장안문
스승 조원재와 이광규
우리나라 장인의 기술교육은 대체로 도제식 형태를 취하지만 체계적으로 제도화돼 있지 않다. 영건의궤 및 상략기록 등을 살펴보면 같은 가문에 속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목수들이 등장하고 또, 대代를 이어 종사한 흔적이 드러나는데 이는 도제식 교육 형태에 가족이 적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도 많은 목수들이 동일업종에 종사하는 친인척의 권유로 목수의 길을 선택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 한다.
신응수(뒷줄 맨 좌측)의 스승 이광규(뒷줄 좌측에서 네 번째) |
이광규는 신응수에게 목공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끌 쓰는 방법부터 다시 가르쳤다. 둥근 나무에 스승 이광규가 그린 선을 따라 치수와 각도를 맞춰 나무를 깎아 내고 대패를 쥔 손에 굳은살이 박힐 때까지 대패질을 되풀이 했으며 두 과정이 완전히 숙달된 뒤에야 톱질을 배울 수 있었다. 스승 이광규의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꼼꼼한 성격 때문에 훈련과정은 매우 혹독했지만 신응수는 고된 작업을 묵묵히 수행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바탕되어 1970년 스물아홉의 신응수는 불국사 복원공사의 부편수를 맡게 됐다.
1962년 국보 제1호 숭례문 해체수리공사에서 이광규는 자신의 스승 조원재에게 신응수를 소개한다. 신응수는 당시 숭례문 해체수리공사의 도편수이자 궁궐목수의 맥을 잇는 조원재 선생을 만난 순간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기억하고 있다. 신응수는 조원재와 함께 지내면서 건축계획부터 설계도본 작성법, 치목법, 재목선별 방법 등 이론적 기틀을 쌓았다. 새벽녘 스승보다 일찍 기상해 마당을 쓸었고 낮이면 숭례문 공사현장에서 일을 했으며 저녁에는 설계도면 그리는 것을 배웠다. 스승으로부터 전통건축도구의 사용방법을 또 다시 익혔으며 목수 기술의 마지막 단계인 설계도면 작성법을 배웠지만 무엇보다 조원재에게 받은 가장 큰 가르침은 장인정신이었다. 오늘날 신응수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에는 굽힘이 없었던 스승에게서 대목장으로서 자존심과 긍지를 배울 수 있었다고 회고回顧한다.
첫 도편수가 되다, 수원화성 장안문
조원재 선생(좌)과 젊은시절 신응수(우)
신응수는 1975년 수원화성 복원공사에서 처음으로 도편수가 됐다. 수원화성 복원공사는 총 4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복원공사는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장안문에서 서장대에 이르는 구간의 1차공사가 시행된 후 화홍문에서 창룡문, 장안문에서 화홍문, 창룡문에서 동남각루까지 각 구간별로 나뉘어 진행됐다. 신응수는 1차 장안문의 복원공사를 시작으로 4차 창룡문 복원공사까지 도편수의 직책을 맡았다.
장안문 복원공사는 서른넷 젊은 도편수에게 있어 패기와 도전의 현장이었다. 신응수는 생애 첫 도편수 임무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숙련된 기술자를 불러 모았고 최고의 목재를 사용하기 위해 산판山坂 현장을 찾아가 직접 벌목작업을 지휘했다.
신응수에게 장안문 공사는 문화재 복원에 앞서 철저한 사전조사와 정확한 실측도면이 작성돼야 함을 깨닫게 해준 현장이었다. 설계사무소에서 제공한 도면에 따라 창방의 치목이 끝나갈 무렵 일제강점기에 기록된 『조선고적도보』를 볼 수 있었다. 이 책에 수록된 장안문 창방머리는 팔달문과 달리 투박하며 통머리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로써 팔달문을 실측해 작성한 장안문 복원설계안의 한계가 밝혀지게 됐다. 장안문 1층과 2층 귀창방은 모두 열여섯 본本이었지만 모두 교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어렵사리 소나무를 구한 뒤 반은 창방 전체를 교체하고 나머지 반은 창방머리만 교체했다. 신응수는 기둥 사괘의 창방머리가 서로 다르게 연결된 사연을 먹칼로 적어 두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전통건물을 복원하기 앞서 직접 실측을 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자료제공 _ 수원화성박물관(담당 학예팀 오선화 031.228.4209)
에디터 _ 박광윤 기자 pky@imwood.co.kr
일제강점기 장안문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