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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행복기금 `배째라' 채무자 양산·성실 상환 역차별 '우려'

[재경일보 이형석 기자] 박근혜 대통령의 가계부채 해결 '1번 공약'인 국민행복기금의 윤곽이 잡히면서 가계부채 문제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는 서민들의 기대가 커지고 있다.

국민행복기금은 특히 가계부채의 가장 취약한 고리인 다중채무(여러 금융회사에 진 빚)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부업체까지 포함한 전 금융권의 6개월 이상 장기연체를 일괄 정리해 채무를 덜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나온 가계부채 대책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빚을 갚지 않고 시간을 끌어도 정부가 언젠가는 해결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심어줘 '배째라'식의 악성 불량채무자들이 늘어나게 할 수 있고 성실 상환자들을 역차별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신뢰와 성실'을 토대로 하는 기본 금융질서를 무너뜨린다는 비판과 도덕적 해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향후 성패를 가늠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소득 대비 원리금 상환비율(DSR)이 40%를 넘는 다중채무자(3곳 이상에 빚을 진 사람)를 '잠재위험 채무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잠재위험 채무자는 173만명으로 추산됐다.

이 가운데 1개월 이상 연체한 고위험 다중채무자는 14만명, 이미 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로 전락한 사람은 11만명이다.

다중채무자는 대부분 저소득·저신용층에 집중된 데다 고금리 대출을 떠안고 있어 가계부채에 있어서 가장 취약한 고리로 꼽히고 있지만, 은행권이 프리워크아웃(사전채무조정)을 운영하고 미소금융·햇살론·새희망홀씨 등 서민금융상품까지 도입됐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박근혜 정부는 국민행복기금을 해법으로 내놨다.

국민행복기금은 개별 금융회사가 풀기 어려운 다중채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처럼 금융회사가 각자 연체채권을 '처분'하는 방식이 아니라, 여러 금융회사의 6개월 이상 연체채권을 사들여 한꺼번에 정리한다.

은행에서 대부업체에 이르기까지 금융권 곳곳에 흩어진 다중채무자의 빚을 모아 원금은 50~70% 이상 깎고 나머지는 장기 분할상환함으로써 신용회복을 돕는 방식이 활용된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다중채무의 늪에서 꺼내 신용을 회복시켜줘야 가계부채 문제가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국민행복기금은 금융권의 1억원 이하 6개월 이상 연체채권을 한꺼번에 사들여 원금을 깎고 채무자와 분할상환계약을 맺는는데, 지난해 말 기준 은행연합회에 등록된 6개월 이상 연체자는 112만명이다. 한국자산관리공사로 넘어간 65만명의 상각채권과 대부업체 채무까지 고려하면 더 많다.

이상빈 한양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어떻게 해도 돈을 갚지 못하는 이들은 어느 한 시점에서 털고 가는 게 낫다"고 국민행복기금이 주효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 교수는 "과거 기업이나 농어촌 부채를 탕감해줬던 것처럼 이번에는 개인의 빚 부담을 덜어주는 셈"이라고 말했다.

신제윤 금융위원장 내정자는 최근 "지금까지는 '자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나는 신용회복을 병행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국민행복기금은 장기 연체자의 빚을 사들여 감면해 줌으로써 재기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신 내정자의 생각과도 맥이 통한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국민행복기금의 초안을 신 내정자에게 보고했으며, 관련 법 제정에도 착수했으며 최근에는 금융권 관계자들에 국민행복기금 운영 방침을 전달했다.

업계는 연체채권 매각 때 적용될 할인율이나 매각대금 지급 방법에 대한 의견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국민행복기금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우선적으로 돈을 빌리면 빌린 사람이 갚을 의무를 지는 게 당연한데, 여기에 정부가 '해결사'처럼 개입할 경우 금융의 기본질서가 무너질 우려가 가장 크다.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

윤석헌 숭실대 금융학부 교수는 "채무자로서는 웬만하면 국민행복기금의 구제범위에 들어가려고 할 것"이라며 "없는 빚도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 은행권 관계자도 "농어가 부채 탕감은 정책자금 부실 등을 '결자해지'한 측면이 있었지만, 다중채무는 엄연히 개인의 경제적 선택에 따른 결과"라고 꼬집었다.

더불어 돈을 성실하게 갚아온 사람과의 역차별 논란도 우려된다.

윤 교수는 "가계부채 문제가 당장 큰 문제를 일으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가져올 상황이라면 모르지만, 현재로선 다소 성급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