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보신각 앞 만세를 외치는 민중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 5천명 가량의 학생과 시민으로 이루어진 대군중이 모였다.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애초 탑골공원이 독립선언의 장소로 정해졌었지만 지난 밤 시위세력과 일제 경찰간의 폭력 충돌이 우려된다는 의견에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으로 식장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들은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소식에 자극을 받은 상태였다. 각 학교의 대표자들은 몇 차례의 비밀회합을 가졌고 민족대표들과 연합운동을 계획했다. 민족대표들은 민족독립운동에 학생들의 조직과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학생들도 자발적으로 기성지도자들의 독립운동을 계획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5천명의 시민을 모으는데는 학생들, 특히 중학교 학생들의 역할이 컷다. 각 학교의 학생단은 탑골공원으로 집결하면서 약 200장에서 1500장 가량의 독립선언서를 통행인들과 상가, 개인 주택에 나눠주었다. 탑골공원의 독립선언식 소식은 삽시산에 서울 시민들에게 퍼져나갔고, 마침 3월 3일에 예정된 고종황제의 인산일에 참가하러 20만명의 지방민이 상경해 서울의 인구는 평소보다 많았다.
종로에서의 만세시위
그렇게 군중은 눈더미처럼 불어났지만, 학생들은 민족대표들의 부재에 당황스러워 했다. 하지만 곧 독립신문1호를 통해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국민에게 비폭력, 비파괴 운동을 관철하라"고 지시한 것을 알게되자 흥분은 더욱 고조되었다.
오후 2시 경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은 자발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읽자 장내는 숙연해졌다가 곧 고함과 환호성이 쏟아져나왔다. 이제까지 억압되었던 민족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군중은 시위대가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롤 쏟어져 나왔다.
한편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 한다는 사실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에게 알리고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전달했다. 곧 80여명의 일본 헌병이 태화관을 포위했고, 민족대표 중 한명인 한용운이 간략히 독립선언식사를 말한 후 축배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자 헌병들은 그들을 체포했다.
그들이 차로 경찰서까지 연행되는 모습을 본 시위대는 자동차를 둘러싸고 열광하고 만세를 부르는 등 환호했다. 민족대표들은 이에 호응해 독립선언서를 창밖으로 살포했다.
▲ 3.1 운동 시위대의 이동범위 1대(노랑) 2대(빨강)
시위대는 여러갈래로 갈라져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를 누비며 옛 왕조의 궁인 덕수궁?창경궁과 외국 영사관을 들렀다. 특히 미국, 독일, 프랑스의 영사관에선 한국이 독립선언을 했음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은 명동골목은 당시 일본인 상가거리였다. 시위대는 여기서 일본인에게 시위를 했고, 이어 조선총독부로 향했다. 서울역 앞 옛 육조(六曹) 거리와 광화문은 시위 군중으로 운집했다. 그들은 경비대의 경계선을 뚫고 덕수궁에 들어가 고종황제에 삼국궁의(三鞠躬) 예를 다하고, 대한문 앞에선 독립연설을 했다.
당시 학생간부였던 최은희 여사의 수기를 통해 온 국민이 합심해서 일제에 저항했음을 알 수 있다. 청년들은 헌병과 순사 앞에서 기죽지 않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노인들은 피해온 여학생들을 숨겨주고 먹을것과 마실것을 주었다. 고종의 인상에 참가하러 온 시골양반들도 만세를 불렀으며 수건을 머리에 두른 할머니들은 시위대에 바가지로 물을 떠주었다.
독립운동에 동참하는 평양권번 기생들
하지만 일제의 탄압도 만만치 않았다. 저녁해가 기울어지자 순사들은 시위대를 가차없이 체포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진압하는 순사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잡혔다. 그들에겐 수갑이나 포승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일제의 잔인한 체포로 인해 시위는 수라장으로 변했고, 부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어두워지는 오후 7시가 되어 시위운동은 일단 끝났으나, 오후 8시엔 마포와 신촌등의 외곽지역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워싱턴 타임즈에 게재된 일본의 학살 장면
만세운동은 3월 1일로 그친것이 아니다. 3월 5일, 서울역 앞에서 대규모의 제 2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번엔 조선총독부가 발포를 허가했다. 4~5천에 달하는 학생들을 집압하지 못한 일본군은 총을 쏘며 위협을했다. 이 과정에서 지도자급 학생들이 대거 희생되어 이후 학생이 주도하는 조직적 독립운동은 불가해졌다. 하지만 서울에서 연달아 발생한 대규모 시위는 각 지방의 독립운동을 자극해 학생들의 유지를 이어가도록 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퍼진 시위는 더욱 격력해졌고 일본의 폭력성도 더해졌다. 천안의 아우내 만세운동은 19명, 평남의 사천장터 시위에세도 수십명, 제암리 학살 사건에서도 수십명이 죽는 등 전국적으로 총 553명이 상망했으며 체포된 자의 수도 12,000명이나 된다.
* 자료 참고 :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