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롯데 창업주 신격호 총괄회장에 후견인(법정대리인)이 필요하다는 가정법원의 결정이 나온 이후, 한동안 소강 상태에 놓였던 롯데 경영권 분쟁 소송 관련 재판이 일본 현지에서 잇따라 다시 열리고 있다.
신 총괄회장의 정신건강 상태가 재판의 주요 변수이고, 항고가 제기됐더라도 일단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처리 능력이 부족하다"는 법원의 첫 판단이 나온만큼 이를 바탕으로 법정 공방이 본격적으로 불 붙을 전망이다.
11일 롯데와 일본 법원 등에 따르면 지난 7일 일본 현지에서 롯데 경영권 관련 핵심소송 2건의 변론이 동시에 재개됐다.
우선 신동빈 회장이 올해 1월 광윤사(光潤社·고준샤)를 상대로 제기한 '주주총회 결의 사항 취소 청구' 소송의 5차 변론이 약 2개월만에 속개됐다.
광윤사는 한·일 롯데 지주회사격인 롯데홀딩스의 지분 28.1%를 보유한 한일 롯데그룹의 뿌리이자 지배구조상 핵심기업이다.
지난해 10월 14일 광윤사는 임시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잇따라 열어 신동빈 회장을 등기 이사에서 해임하고 신동주 전 부회장을 신격호 총괄회장을 대신할 광윤사 새 대표로 선임했다. 아울러 이사회는 신격호 총괄회장의 지분 1주를 신동주 전 부회장에게 넘기는 거래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신동주 전 부회장은 광윤사의 과반 최대주주(50%+1 지분)이자 대표로 등극했다.
하지만 신동빈 회장은 "신동주 전 부회장의 광윤사 지분 획득과 대표 선임 모두 서면으로 제출된 신격호 총괄회장의 의중을 바탕으로 진행된 것으로, 신 총괄회장의 정신건강에 논란이 있는 만큼 효력이 없다"는 취지의 소송을 일본 법원에 제기했다.
만약 향후 일본 법원이 한국 법원의 신격호 총괄회장 후견 개시 결정 등을 바탕으로 신동빈 회장의 손을 들어줄 경우, 신 회장은 광윤사 이사로 복귀하는 반면 신동주 전 부회장은 대표이사직과 과반 최대주주 지위를 모두 잃게 된다.
아울러 같은 날 7일 신격호 총괄회장이 일본 롯데 홀딩스를 상대로 제기한 '대표권 및 회장직 해임 이사회 결의 무효' 소송의 6차 변론도 두 달여만에 열렸다.
지난해 1월 일본 롯데 홀딩스 이사직을 잃은 신동주 전 부회장은 같은 해 7월 27일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을 대동하고 도쿄 홀딩스 본사를 방문, 신동주 회장과 쓰쿠다 다카유키(佃孝之) 홀딩스 사장 등 6명의 이사를 구두로 해임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신동빈 회장은 긴급 이사회를 열어 반대로 신격호 총괄회장을 대표 및 회장직에서 해임하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게 했고, 이 이틀간의 해임 공방으로 결국 '롯데 형제간 경영권 분쟁'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후 신동주 전 부회장은 신격호 총괄회장의 위임으로 일본 법원에 "신 총괄회장 해임 당시 신 총괄회장에게 이사회 소집 통보도 하지 않는 등 절차상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신 총괄회장 해임 결정은 무효"라는 취지의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당장 작년 11월 26일 처음 열린 심리에서부터 롯데 홀딩스측은 "신격호 총괄회장이 소송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위임장을 제출한 것 아닌가"라며 신 총괄회장의 정신건강 상태에 의문을 제기했고, 이후 변론과 심리도 신 총괄회장의 건강과 위임 효력 등에 대한 양측의 주장만 반복되며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지난달 31일 한국 가정법원이 신 총괄회장의 후견인(법정대리인)을 지정하면서, 이미 신 총괄회장의 정신건강 문제를 사실로 공인한만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일본 재판도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가정법원은 심판문에서 2010년, 2012년, 2013년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외래 진료 당시 신 총괄회장이 기억력·지남력(시간·장소·주변 등에 대한 인식능력) 장애를 호소한 점, 2010년께부터 아리셉트(Aricept)·에이페질(Apezil) 등 치매 관련 치료 약을 지속해서 복용한 점 등을 후견인 지정의 근거로 들었다. 2010년 이후 치매 가능성을 인정한 만큼, 한국 법원의 후견 개시 심판은 2015년 말에 이뤄진 신격호 총괄회장의 '위임 효력' 측면에서 신동주 전 부회장에게는 불리한 소식이다.
롯데 관계자는 "한국 법원이 일단 신 총괄회장의 정신건강 문제를 처음 인정한 사실은 당연히 신격호 총괄회장의 '위임'을 근거로 신동주 전 부회장이 일본에서 제기한 소송들의 재판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신동주 전 부회장측의 항고로 후견인 확정 심판은 뒤로 미뤄졌지만, 이미 공개된 신 총괄회장 정신건강에 대한 한국 법원의 판단을 일본 법원도 참고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편 성년후견인 제도는 정신적인 제약이 있는 사람에 대해 법원이 의사결정을 대신할 법적 후견인을 지정하는 제도로 지난 2013년에 도입된 것으로 예전의 ‘금치산자’‘한정치산자’제도를 대체한 것이다.
성년후견인제도는 후견인이 본인을 대신해 재산을 관리하고 치료와 요양을 받도록 도움으로써 재산관리에만 집중했던 금치산자,한정치산자 제도의 범위를 넓힌 것이다.
법원에 따르면 전국에 접수된 후견인 신청 접수는 4천7백여건이며 이 가운데 2천4백여명이 성년후견인으로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