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의회와 행정부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언급과 입장 표명이 최근들어 부쩍 빈번하게 나오고 있다.
지난달말 미 의회가 먼저 행정부에 한.미FTA를 비롯해 계류중인 3개 FTA의 조속한 심의를 위해 행정부에 필요한 조치를 촉구한데 이어 2일 무역대표부(USTR)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무역정책 어젠다 및 2008 연례보고서'를 공개하면서 한.미 FTA에 대해 나름대로의 입장을 표명했다.
3일에는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이 하원, 세입위원회에 출석, "오바마 대통령이 한.미FTA와 미-파나마, 미-콜롬비아 FTA를 진전시키기 위해 의회와 협력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런 기류는 마치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한.미FTA의 비준 문제에 상당한 우선 순위를 두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주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최근 미국 의회와 행정부에서 제기됐던 한.미FTA 관련 개별 발언과 전후맥락을 살펴볼 때 섣부른 기대를 품는 것은 곤란하다. 오히려 상황이 아직도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을 재확인시켜주는 쪽에 가깝다.
2일 공개된 USTR의 보고서는 오바마 행정부의 무역정책의 큰 틀을 공식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그 내용은 오바마 대통령이 대선 유세때 공약으로 내건 FTA에 관한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한 것에 가깝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USTR는 이 보고서에서 "신속하게, 그러나 책임감있게" 한국과 콜롬비아, 파나마 등과 체결한 FTA 문제에 대처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일각에서는 이를 놓고 오바마 행정부가 FTA비준 문제에 본격적으로 달려들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다른 쪽에서는 FTA 재협상에 오히려 더 무게를 둔 것이라며 정반대에 가까운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통상전문가들은 USTR의 보고서가 나오게 된 배경을 감안할 때 "신속하게, 그러나 책임감있게" 대처한다는 표현에는 전임 조지 부시 행정부가 벌여 놓은 통상현안에 대한 `재검토' 작업에 곧 착수하겠다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8년 간 재임한 부시 대통령 행정부가 무역분야에서 남겨놓은 유산들 가운데는 미국민의 국익과 거리가 멀고 환경.노동 기준이 미흡한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오바마 행정부가 `책임감'을 갖고 새로 들여다보겠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거론된 `책임'이라는 단어에는 전임 부시 행정부의 일부 무역정책이 `무책임'했다는 비판적 시각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USTR는 오바마 행정부 무역정책의 기준으로 △룰에 입각한 국제무역체제 지지 △무역정책의 사회적 책임 및 정치적 투명성 증대 △에너지.환경 목표의 진척을 위한 무역정책의 활용 △무역정책을 통해 주요 미해결 현안의 해결 △기존 FTA와 양자투자협정의 책임감있는 이행 △개도국.최빈국 지원 등 6개항을 꼽았다.
첫 항목으로 꼽은 `룰에 입각'한 국제무역체제의 지지라는 것은, 미국이 보호무역주의로 흐르고 있다는 교역상대국들의 비난을 불식시키면서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정을 준수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대외용에 가까운 항목이다.
그러나 두번째 항목부터는 FTA 체결 상대국에 대해 환경.노동.에너지 등의 분야에서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기준에 미흡한 부분을 개선해야 한다는 압박을 노골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USTR 보고서가 한.미FTA의 재협상 의지를 확고히 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보고서가 재협상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일단 기존에 부시 정부가 벌여 놓은 내용을 면밀히, 신속하게 재검토한 후 기준을 마련해 대응하겠다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게 워싱턴 통상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그 기준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은 상태지만 이미 체결된 FTA라는 이유로 자동적으로 협정이 비준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용을 면밀하게 따져보겠다는 정도로 해석된다.
이런 입장은 오바마 행정부의 무역정책이 오바마의 대선 후보 시절 FTA 문제에 관련한 공약의 범주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재확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USTR의 보고서가 공개되기 불과 며칠 전인 지난달 27일 막스 보커스 미 상원 재무위원장과 찰스 랑겔 하원 세입위원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행정부에 계류중인 3개 FTA의 조속한 심의를 위해 행정부가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따라서 USTR의 이번 보고서는 의회의 요구에 대한 답신 형식이다.
이를 통해 오바마 행정부는 원론적인 내용이기는 하지만 기존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재차 재천명한 셈이다.
앞서 의회가 행정부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고 입장을 표명한 것은, 경기부양법에 미국산 제품의 우선적인 구매를 명시하는 `바이 아메리카' 조항을 반영시켜 마치 의회가 보호무역주의를 표방한 것 처럼 인식됨에 따라 이런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FTA에 관심을 표명하는 정치적 제스처를 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의회와 행정부의 선문답식 `대화'에 담긴 뉘앙스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마치 의회가 서둘러 FTA 비준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거나, 행정부가 신속히 FTA 비준을 위한 작업에 나설 것이라는 식으로 잘못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이트너 재무장관이 3일 하원 세입위에서 한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볼 때는 의원들의 질문에 원칙론적인 차원에서 수동적으로 답변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한.미 FTA의 비준이 머지 않아 가시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는 것은 아직은 섣부르며, 여전히 FTA 문제가 미 의회나 오바마 행정부에서는 부차적인 의제에 머물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FTA 문제에서 새로운 진전이 이뤄졌다고 볼 만한 계기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