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이 선주측의 자금 사정으로 유조선 5척 건조에 대한 계약을 해지한다고 17일 공시했다.
공시에 따르면 현대중공업은 유럽 선주사와 지난 2008년 6월 유조선 9척 건조에 대한 계약을 했으며, 이번에 취소된 건은 유조선 5척에만 해당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조선업황이 악화된 이후 '수주 가뭄'에 시달려 온 조선업계에서 인도 연기 및 취소는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져왔다. 업계 1위인 현대중공업이 공시를 통해 건조계약 취소를 공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선종이 변경된 건이 공시된 적은 있었지만 계약 취소가 공시된 것은 처음이다"며 "이번 계약 취소 공시는 건조 계약 당시 그 내용이 공시됐었기 때문에 추후 계약에 변경사안이 생겼을 경우 공시해야 한다는 규정을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취소된 계약의 규모는 4800억 원으로 최근 매출액 대비 2.41%에 해당한다. 이번 계약 취소건이 현대중공업 매출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그러나 업계 1위인 조선사가 계약 취소를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업계에 미치는 충격은 상당하다.
현대중공업은 수주잔량 등에서 수년간 부동의 세계 조선사 1위 자리를 고수해왔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조선 수주가 현저하게 감소하면서 수주 잔고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2월 말 기준 현재 현대중공업의 수주잔량은 314척 539억 달러로, 2년6개월 치의 일감을 확보하고 있는 상태다.
최근 조선업황이 회복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발주 선종이 벌크선, 유조선 등에 그치고 있어 '수주가뭄'이 완전히 해갈됐다고는 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더욱이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상선 수주를 한 건도 하지 못했다. 여기에다 최근 시황 악화로 7척이 발주 취소, 15척이 선종 변경 돼 건조되는 등 최근 울산 조선소에서 건조된 선박들이 인도 연기 및 취소로 조선소에 그대로 묶여 있는 상태로 알려졌다.
현대중공업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조선사이면서 동시에 플랜트, 전기전자 등 사업다각화를 통해 안정적인 포트폴리오를 구축해왔다. 때문에 지난해 타사 대비 수주가뭄의 여파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향후에도 수주 실적이 개선되지 못한다면 이는 조선사업 부문의 실적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의 이번 계약 취소 건으로 현대중공업의 위상이 흔들린다고 볼수는 없다"면서도 "세계 1위 조선사가 수주한 계약이 취소 위기에 처할 정도로 국내 조선업계가 힘들다는 방증일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일부 조선사가 저가 수주, 생존형 수주 논란에 휩싸인데 이어 이번 일을 계기로 현대중공업마저 저가수주에 나선다면 국내 중소형 조선사들은 더욱 힘들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