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부부의 삶을 다룬 연극이 있다. 사실은 두 쌍의 부부가 애들 싸움 때문에 만났다. 앞니 두개가 부러진 아이의 부모, 갑이라 하자. 몽둥이로 친구 앞니를 부러뜨린 아이 부모, 을이라 하자. 갑은 지적이고 격식을 갖춰 문서를 읽어내려간다.
"4월 3일 오후 5시30분 뒤낭 공원에서 막대기로 중무장한 열한 살의 페르디낭이 우리 아들 브루노의 안면을 정통으로 가격했습니다...", "중무장한?!" 갑의 말에 을이 경악한다.
아들의 앞니를 부러뜨린 을을 만나 정중한 사과를 받고 사후 조치, 애들 교육, 사건재발방지 등에 대해 진지하게 상류층 지식인답게 의논하려고 하는 갑. 을의 생각은 갑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다. 을은 을의 주장과 스타일이 있다.
이는 연극 <아트(Art)>의 작가 야스미나 레자(프랑스)의 신작 <대학살의 신>. 2008년 3월 런던 윈드햄극장에서 초연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지난해 3월 브로드웨이에 입성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연출가 한태숙의 연출로 4월 6일부터 5월 5일까지 초연된다.
공연 기획사 신시컴퍼니 측은 연극 <대학살의 신>을 '소통의 부재를 적나라하게 꼬집는 연극'이라고 소개했다. 이에 대해 한태숙 연출은 "인간의 본성과 소통의 부재를 적절하게 결합했다"고 밝혔다. 실수로 대본을 잘못 받아보게 된 한태숙 연출,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대학살의 신>의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 원작자의 능력에 업혀가고 싶었다고 말했을 정도.
4명의 사십대 중년 부부는 사과(?)·중재(?)·협상(?)의 의도로 모였을지 모른다. 서로의 의도와 생각, 대화가 서로 어긋나고 예상치 못한 상대의 반응, 그에 따른 또 다른 의도치 않은 격한 대화와 몸싸움 등으로 사태가 심각해진다. 급기야 두 가정 사이에, 심지어는 부부 사이 내부관계에 신뢰, 인내가 깨지고... '우리 편', '너희 편' 구분이 힘들다. 나 홀로인 인생, 누구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외톨이' 같은 씁쓸함.
◆ 극적이고 톡톡 튀는 대표적인 네 캐릭터
연극은 오지혜, 김세동, 박지일, 서주희 네 명 실력파 배우들만 출연한다. 어느 누가 주인공이라 할 수 없이 네 명 분량이나 중요도는 비슷비슷하다.
아프리카 다르푸르 사태를 연구하고 책도 쓰는 작가 베로니카 역 오지혜. 오지혜는 자신에게서 '재수없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극대화되어 베로니카를 통해 표현되어진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그 주장을 꼭 이뤄내려는 강한 캐릭터다. 남편 미셸 역 김세동은 아내 분위기를 맞춰주며 자기 할 말 못하는 소심남. '눈치보기 달인', '중립자'인 그도 성깔이 있다. 할 말은 해야겠다. 더 이상 아내의 '가식'을 못 봐주겠다.
알렝 역 박지일은 핸드폰을 손에서 절대 놓지 않는 변호사. 자식 문제보다는 내가 받을 보상이나 외적인 사업에 관심 많은 인물. 태도가 건방져 보여 기분 나쁘다. 그러나 무책임하지는 않다. 충분한 보상은 하려고 한다, 돈으로. 그의 아내 아네트 역 서주희. 재태크를 하는 가정주부, 신상을 좋아한다. 말투가 조곤조곤하고 여성스럽다. 아들이 '가해자'라는 사실에 미안해하고 좋게 해결하려고 하지만, 억울함을 못 참아 그만 토하고 마는데... 이 장면은 몇 번을 봐도 놀랍기만 하다. "어떻게 저렇게 리얼할 수 있을까"라고 탄성을 자아낼 정도.
인간은 한 가지 특성만 갖고 있는 것 아니다. 여러 특성을 소유한 복합적인 존재다. 이 네 명 캐릭터의 모습이 한두개 혹은 여러개가 '내' 안에 있을 수 있다. 그 비율에 따서 서로 다른 성격으로 드러나겠지만, 연극 속 인물이 '그'가 아닌 '나'라는 사실이 놀랍다.
◆ 공감 백배, 유쾌하고 통쾌한 웃음 선사
연극은 극적인 상황이지만, 누구나 공감할 만한 대화로 이어간다. 결혼 여부, 성별에 상관없이 관객들은 무릎을 치며 '그래, 그래'라며 공감 해마지 않는다. 저런 상황에서 당연히 저런 반응이 나올 것이라는 것.
오지혜는 "관객들이 그동안 못하고 살았던 욕이나 말들을 우리가 대신 할 테니 관객들은 연극을 보면서 통쾌하게 웃고 스트레스를 다 풀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 관객들이 대리만족을 얻어서일까. 공연시간은 불과 90분, 그동안 극장은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 인간 본성에 대한 사색...
소통의 부재로 서로 어긋나는 대화와 격해지는 상황들, 보고 있노라면 정말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소통의 부재로 애먹은 적 있다면 극을 보고 잠깐이라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일 수 있다. '자기중심성' 때문에 서로 이해를 못 하고 대화의 초점이 빗나간다. 내가 의도한 바가 대화를 통해 해결이 안 될 때 오는 괴리감, 화남과 피해의식 등 격한 감정들. 인간은 자기포장을 하고 살아간다. 고상한 척, 지적인 척, 이해심 많은 척하지만 결국 가시 돋친 말, 비꼬는 말을 넘어 삿대질, 비방, 욕지거리로 이어진다.
다양한 관객층에 충분히 어필되는 연극 <대학살의 신>. 그러나 싸움으로 서먹해진 부부들이나, 인간관계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연극은 5월5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