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시장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 차원에서 상생을 위한 대기업의 중소기업 지원을 강조하고 있지만 막상 현장에서의 상황은 별반 다름이 없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공론이다.
특히 건설공사를 진행하며 공사대금을 장기어음으로 끊어주는 고질적인 관행이 기승을 부리며 일선 중견업체의 유동성을 심각하게 옥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으로부터 아파트 건설공사를 하청 받고도 임금을 지불하지 못해 공사가 중단돼 부도를 맞은 바 있는 건설업체 관계자는 “보통 건설사가 발주처로부터 공사비를 현금으로 직접 받아 가면 하도급 업체에게는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기간의 어음을 끊어주는 일이 다반사”라며 “정부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강조하고 있지만, 현금으로 직접 대금을 받고 하도급업체에게는 어음을 끊어주는 불합리한 일이비일비재 하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우리 회사의 경우에도 하도급을 준 회사가 SH공사에게 공사비를 현금으로 받은 뒤 우리에게는 어음을 끊어줘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라며 “상생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지만 건설시장만은 상생과 동떨어진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정부와 업계에서 심심찮게 들리고 있지만 대형건설사들의 횡포는 여전한 상황이다.
건설시장은 대형 건설업체로부터 중견 건설업체, 중소 건설업체로 이어지는 다단계 하청구조를 이루고 있고 공종도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편법·관행이 판을 치며 중소기업들만 몸살을 앓고 있다.』
◆ 불공정 거래 오히려 늘어
지난 달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에서 대형건설사 20개 업체에 4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51억 원 상당의 위반금액을 하도급업체에게 지급하도록 조치했지만 이정도 수준으로 불공정거래를 일소할 수 없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었다.
하도급공사를 겹겹이 입찰에 부쳐 공사대금을 깎는 이른바 ‘후려치기’가 대형건설사들 사이에서 횡횡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벌금 수위가 너무 낮아 실효성을 거두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G건축사무소 관계자는 “다중입찰을 통해 하도급업체를 선정하게 되면 하도급공사비는 원청업체가 산정한 실행예산보다 낮아질 수밖에 없다”라며 “최근 SK건설은 지방에 아파트 공사를 하면서 5개 하도급업체를 대상으로 지명경쟁 방식으로 입찰을 실시했으나 최저가 업체를 낙찰자로 선정하지 않고 저가로 입찰한 2,3개 업체를 다시 추려 재입찰을 실시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문제는 정부차원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강조하고 있지만 막상 현장은 전혀 변하지않았다는 점”이라며 “오히려 이 같은 불공정행위가 늘고 있어 중소기업은 물론 중견기업들까지 휘청거리고있는 상황”이라고 성토했다.
위와 관련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 관계자는 “대부분의 건설업체들이 2008년부터 시작된 부동산 경기침체로 자금난을 겪게 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공정 하도급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라며 “자체조사 결과 서울 수도권 지역의 건설업 불공정하도급 신고건수가 07년 255건, 08년 396건 ,09년 457건으로 지속적으로 늘고 있고 올해는 이미 300여건에 가까운 신고가 접수돼 지난해보다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 지능화, 대물변제까지 등장
한편 뿌리 깊은 관행처럼 내려오던 건설업계의 불공정 거래 행위 수법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도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불공정 하도급 유형은 하도급 대금이나 지연이자를 제대로 주지 않는 경우다. 원청업체는 건설 기성고 파악 뒤 60일 이내에 하도급 대금을 지급해야 하고 기한이 넘으면 지연이자까지 줘야 하지만 기한이 지나도 하도급 대금을 지급하지 않고 버티는 수법이다.
이는 향후 갑인 원청업체에게 일을 받아야만 하는 하도급업체 입장에서 대금에 대한 요구를 강하게 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한 대형 건설사의 대표적인 수법 중 하나다. 또 공사대금대신 미분양 아파트를 하청업체에게 주는 이른바 대물변제 수법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과거에도 아파트 가격을 빼고 공사대금을 주는 대물변제 방식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공사대금은 대금대로 주고 아파트는 별도 계산을 치러 하도급업체에게 떠안기는 등 그 방법이 지능화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수법은 원청업체가 부도가 날 경우 대금을 채권이나 어음으로 받는 것과는 다르게 보호를 받을 수 없어 아파트를 고스란히 날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아울러 대형건설사가 발주처로부터 현금으로 대금을 지급받고서는 하청업체에게는 어음으로 결제하는 관행도 고질적인 병폐로 손꼽히고 있다.
공정위가 건설회사에 대해 불공정 하도급 거래여부를 조사한 결과 서해종합건설과 동양건설산업 등 4개업체가 발주자로부터는 현금을 받고도 125개 하도급업체에게는 어음으로 공사대금을 지급한 것으로 드러난바 있지만 이런 관행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모습이다. 이와 관련 CM업체인 N사 관계자는 “여전히 불공정행위가 줄어들고 있지 않다”라며 “우리 회사도 모 재건축 사업장에서 최근 CM계약을 맺었지만 시공사가 대금 일부를 어음으로 결제하는 등 불법 행위가 판을 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대형건설사들에 의한 불공정 거래는 경영 환경이 열악한 하도급업체의 유동성을 옥죌 수밖에 없다.건설협회 관계자는 “사실 건설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중소기업에 대한 불공정 거래가 늘어단다”라며 “대형건설사 하나에 수많은 하도급업체가 연관된 것을 감안하면 그 피해액은 가늠할 수 없다”고 말했다.
◆ 20개 업체 적발… 빙산의 일각
관계자들은 지난 달 20개 건설사가 불공정 거래행위로 공정위에 적발된 바 있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취재결과 국내 중견건설사를 대표하는 반도건설 등 8개 업체는 건설공사를 위탁할 경우 공사대금 지급을 보증해 줘야함에도(하도급법 제13조) 관련 하도급 업체들에게 지급보증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남광토건은 관련 하도급업체들에게 법정기일을 초과하는 기일의 장기어음을 발행하고 그에 따른 어음 할인료 22억원을 미지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동양건설산업 등 12개 업체도 189개 관련 하도급 업체들에게 법정 지급 기일을 초과해 하도급 대금을 지급하면서 그에 따른 지연이자 8억5천100만 원을 지급하지않아 적발됐다. 이와 관련 G건축사무소 소장은 “이처럼 선급금 지연이자 미지급이나 하도급 대금 조정 계약 지연 등 국내 대형건설사들 사이에서 갖가지 불공정 거래가 횡횡하고 있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며 “국내 대표 건설사인 현대건설, 삼성물산(건설부문)등 대기업들도 관련 하도급업체의 등골을 빼먹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건설업계의 불공정 거래 행위를 원천적으로 근절하기 위해서는 관련법 정비도 필수겠지만, 대표 건설사들의 도덕성도 뒷받침되어야 한다”라며 “말로만 상생을 외치는 것보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먼저 보여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한편 공정위에서 건설업계에서 판을 치고 있는 대물변제, 대금 후려치기 등 불공정 거래행위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이에 따른 후속조치가 나오지않아 현장관계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저가 하도급 결정 등과 같은 대형건설사의 횡포가 상도를 넘어가고 있지만 이에 대한 벌칙수위가 미비해 악순환의 고리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만으로는 대형건설사들의 불공정 행위를 근절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고 있어, 이와 관련된 법령 정비가 시급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불공정 행위를 강제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관계법령이 없고, 과징금 규모가 너무 작아 실효성이 없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어 상생을 위해서는 법령정비가 우선이라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는 것. 이와 관련 법무법인 영진의 강정민 변호사는 “하도급 법규를 위반하게 되면 강력한 제재가 뒤따라야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관계법령이 없다”라며 “건설시장의 불공정거래를 근절하기 위한 실효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