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회퍼…만프레드 베버 | 국제제자훈련원
[재경일보 박성민 기자] "만일 제정신을 잃은 운전자가 폭주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 위로 차를 몰아 행인들을 치고 질주한다면 목사인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사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2차대전 중 독일 나치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가 발각돼 종전되기 직전 39세의 나이에 교수형을 당한 `독일의 양심`, `행동하는 신학자`, 그리고 순교로 귀결된 정치참여와 저항으로 행동하는 신앙인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1906~1945).
만프레드 베버(Mafred Weber)가 본회퍼가 남긴 메시지와 사진 자료로 엮은 「정말 기독교는 비겁할까? Freiheit zum Leben(원제: 자유로운 삶을 위하여)」를 통해 서슬퍼런 광기 아래에서 믿음뿐 아니라 믿음을 말과 행동으로 실천한 본회퍼를 소개하고자 한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 2월 4일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 태생의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행복한 유년기를 지냈다. 그는 뛰어난 피아노 연주가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 카를 본회퍼 박사(Karl Bonhoeffer)는 권위 있는 정신병리학자로서 다년간 베를린 의과대학의 교수를 역임했으며 학계에서 신망이 높은 학자였다. 그의 어미인 파울라 본회퍼 여사(Paula Bonhoeffer)는 신앙심이 돈독하였다.
1923년 17세에 튀빙겐 대학교에 입학, 21세의 나이에 1927년 `성도의 교제`라는 학위논문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24세에 대학교수 자격을 획득한 천재 신학자다. 카를 바르트는 이 논문을 가리켜 `신학적 기적`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집권한 후 민족의 정체성과 혈통을 제한하는 나치의 신학으로 유대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였으며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천만명의 희생자를 냈다. 독일의 양심적 지식인과 신앙인들은 히틀러에 항거하다 감옥과 집단수용소,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당시 히틀러는 교회까지도 그의 말에 복종하는 `국가교회`로 통합시켰고 도처에서 이 교회를 인정하지 않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직장에서 추방을 당했다. 여기에 저항한 일부 목사들은 `긴급 목사 동맹`을 결성하고 `고백교회(나치즘과 그에 호응한 독일 기독교도에 대항한 독일의 개신교회 운동)` 탄생시켰다. 고백교회는 목사의 파면과 투옥, 교회 폐쇄에도 굽히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나치즘 광기를 향해 질주하던 독일 사회에서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않으려 하며 히틀러의 하수인이 되어가던 독일교회에 맞서 싸우며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고 외치며 나치에 저항했던 그는 성경에 기반을 둔 확고한 신학을 가진 신학자이자 목회자였으며 순교자였다.
2차 세계대전 직전 1939년 7월 여름, 미국 뉴욕의 유니언신학교에서 초청교수로 있던 본회퍼에 대해 미국의 친구들은 신변을 염려해 귀국을 만류했다. 특히 유니언 신학교의 라인홀드 니부어는 본회퍼가 미국에 머무르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본회퍼는 그의 귀국을 만류하는 미국과 독일 성도들에게 "조국의 위기에 동포들과 함께 지내지 않는다면 전후 독일 기독교 재건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편지를 남기고 불의에 싸인 조국의 모습을 방치할 수 없어 기어코 2차 대전을 앞두고 귀국을 감행했다. 그는 `이 시대의 시험`에 맞서 외롭게 싸워야할 독일의 가족들과 친구들을 떠나 홀로 안전한 곳에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6주 후 다시 독일로 돌아오게 되고, 그가 독일로 돌아온지 두달이 채 못돼 히틀러의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했다.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전쟁에 몰두하는 히틀러 치하에서 누구도 평화를 입밖에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평화를 힘차게 외쳤다.
이후 본회퍼는 1943년 4월 5일 독일제국에 대한 음모 혐의로 게슈타포(비밀국가경찰)에 체포돼 2년 동안 독일 각처의 강제수용소를 전전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를 제거하려는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본회퍼는 살아서 감옥 문을 나설 가능성이 희박해졌음을 직감했다.
본회퍼는 `하나님이 모든 이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는 말씀만 들으려 하고, 어찌 살아야 하는지는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형식주의를 일컬어 `싸구려 은혜`라고 규정했다. 본회퍼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 받는다는 `값싼 은총` 대신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값비싼 은총`을 역설함으로써 실천하는 신앙을 강조했다. 그는 "까마귀처럼 우리는 `싸구려 은혜`라는 시체 주위에 모여, 그 시체의 독을 받아마셨다. 그 결과 예수를 본받는 삶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말았다" (본회퍼가 직접 쓴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독재자 히틀러 앞에 침묵하던 당시 독일교회를 강력히 비판하며, 행함이 없는 말뿐인 신앙은 `싸구려 은혜`라고 역설하였다.
본회퍼의 삶은 강단에서 말과 이론으로만 신앙과 신학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신앙과 신학을 보여줬다.
본회퍼가 수감되었던 테겔의 형무소 감방. |
본회퍼에게 늘 제기되는 문제가 있다. `평화주의인 목사요, 신학자인 그가 어떻게 폭력적인, 사람을 죽이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할 수 있느냐`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회퍼의 이같은 행동은 폭력의 문제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책임윤리와 저항권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는 게 기독교윤리학자들의 판단이다.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있어 누구인가`를 질문하였다. 그가 찾은 답은 `예수 그리스도는 타자(他者)를 위한 존재`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타자를 위한 존재라면 교회도 역시 `타자를 위한 교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본회퍼는 신앙과 일치된 삶으로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도 관심을 끌었다.
국내에서도 본회퍼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 적지 않다. 특히 한명숙 민주통합당 전 대표는 본회퍼를 통해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찾았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197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되어 끔찍한 고문을 당했던 한 전 대표는 당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처음으로 죽음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그런 그녀를 건져준 것은 본회퍼의 옥중서간집이었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 내가 매맞는 것, 내가 죽는 것, 이것이 그리 심한 고통은 아니다. 나를 참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밖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한 전 대표는 본회퍼의 이 한 마디야말로 천길 낭떠러지에서 자신을 건져 올려준 동아줄이었다고 고백했다.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신앙을 꿋꿋이 지키며 고통을 이기고 승리의 세계를 열어가는 본회퍼의 글은 큰 울림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히틀러가 항복을 선언하고 자살하기 보름전인 1945년 4월 9일 그는 게슈타포 장관의 직접 명령으로 이른 아침 39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본회퍼는 다음과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교수대로 끌려나갔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삶의 시작입니다."
그 당시, 처형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본회퍼의 교수형에 참관하였던 나치 친위대(SS) 군의관은, 그 사건 이후 10년이 지나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날 아침 5시에서 6시 사이, 수감된 이들이 감방에서 끌려 나왔고 군사 재판에 부쳐졌다. 나는 반쯤 열린 문을 통해서, 죄수복을 벗어놓고 본회퍼 목사님이 그의 하나님께 조용히 무릎 끓어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끌리는, 이 남자의 깊은 헌신과 신뢰가 넘치는 기도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형장에 가서도 그는 다시 짧게 기도를 드렸고, 그 후에는 흐트러짐 없이 담담하게 교수대에 올라섰다. 그의 죽음은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거의 50년 동안이나 의사로 살면서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았지만, 하나님께 그토록 헌신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친구 베트게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들은 나중에 `옥중서간`이란 제목으로 출판돼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과 용기를 줬고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내는 단초를 제공했다. 더 살았더라면 전후 교회와 신학의 흐름을 바꿨을 것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뛰어난 인물이 교수대에서 생을 마친 것이다.
본회퍼가 처형된 3주일 뒤 히틀러는 자살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은 패배했고 연합군은 승리했다.
그의 비문에는 이와 같이 새겨져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 그들 형제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1906년 2월 4일 브레슬라우에서 출생. 1945년 4월 9일 플로센부르크에서 죽다." 정현숙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