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의 강연이 열린 충남 아산시 현충사 경내 충무공 옛집은 이순신 장군이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10년간 무예를 연마한 곳이다. |
[재경일보 박성민 기자] "대학교 2학년 2학기가 끝나갈 때 도서관에서 굴러다니던 난중일기를 읽었다. 깜짝놀랐다. 전쟁을 수행하는 장군이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한 일기를 모아놓은 그 한권의 책이 한 젊은이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았다."
26일 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 경내 충모공 이순신 장군이 살았던 옛집에서 고택정담(古宅情談) 첫 번째 이야기로 소설가 김훈(64)이 '칼의 노래―내가 만난 이순신'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열었다.
그가 이순신을 처음 만난 건 고려대 영문학과 2학년 2학기 재학시절이었다. 김훈은 당시 바이런, 키츠 등 영시들을 접했고 그 시절 대학에서 배운 낭만주의 시들이 매우 찬란한고 아름다운 문학이라고 느꼈지만, 젊은이들이 빠지기 쉬운 오만한 독단일 수 있다고 생각됐고 인간의 고통과 이 세상의 모순, 야만성을 설명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고 느꼈다.
그후 그는 군대생활 중 보초를 서면서 '나이를 먹고 나의 언어를 확실하게 장악하게 되는 어느날, 난중일기와 이순신이라는 남자의 내면에 대해서 말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고 그후 37년이 지난 어느날 그는 돌연 칼의 노래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고, 40일만에 칼의 노래를 완성했다.
소설가 김훈이 본 이순신은 매우 무서운 인물이기도 했고, 또 사소한 것까지도 챙기는 치밀함을 갖춘 모습이기도 했다.
그는 "나는 이 분이 자비로운 분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러나 무자비한 분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비나 무자비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갈 수 밖에 없는 길을 가는 것이었고, 우리가 보기에 '너무 무자비한 것 아니냐'하는 이런 잣대를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순신은 전쟁 7년간 130번이나 군법을 집행하여 부하를 처형하거나 곤장을 때기거나 옥에 가두거나 쫓아내거나 했고, 처형하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반면 힘든 상황에서 하층 계급의 이름·나이·출신과 배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자기 부하의 사소한 것까지 챙기는 그런 자비로운 모습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이순신은 총알의 갯수까지도 헤아리는 치밀함을 갖고 있었고, 부하의 여자가 누구인지 까지 알 정도로 부하들의 동태를 소상히 알던 마치 안살림하는 여자처럼 꼼꼼한 보습을 지녔다고 그는 말했다.
김훈은 "이순신은 한없이 자상하고 가차없는 모습의 무서운 그런 양극단의 모습을 가진 인물이었다. 백성앞에서는 한없이 온순하고 적앞에서는 한없이 용맹한 인물이었다. 또 이것이 리더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충무공에 대해 정치적으로 감각이 없었던 분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비리를 한 자들의 이름을 낱낱이 써 임금에게 보낸 것에 대해 말하며 "이같은 행동이 정치적으로 위태로워지는 일이었음에도 이런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것 같았다"라며 "반대로 이러한 모습들이 비극을 자초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충무공에 대해 "정치적으로 순결한 '군인'이었다"며 "오직 의의 길을 간 것"이라고 평했다.
26일 현충사 경내 충무공 옛집에서 김훈은 "대학 시절 읽었던 '난중일기' 한 권이 한 젊은이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았다"고 전했다. |
'칼의 노래'는 주로 명량해전 이후와 노량해전 까지 쓴 것이다. 김훈은 자신이 못쓴 대목은 이순신의 '침묵' 부분이라며 때문에 자신의 소설이 '미완성'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은 1597년 1월의 얘기를 말하는 것인데, 당시 일본은 일본의 한 무장이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고,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은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한 이순신은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고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고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4월 1일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풀려난 것을 말한다.
김훈은 이 일에 대해 "이 분도 인간이기 때문에 몸과 명예를 짓밟아놨던 조선의 왕과 정치 권력에 증오심이나 적개심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며 "그러나 이순신이 죄없이 모욕과 치욕을 당한 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기록을 좋아하시는 분이 편지 등에도 한 마디를 하신적이 없어 그 내면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부분을 쓰려다 기진맥진했다고 한다. 한 마디라도 했었어야 쓰는데, 충무공은 한 마디도 하지않고 마음에 담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순신의 이 '침묵의 내면'이 무서웠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을 묘사하려다 번번히 실패했다. 김훈은 "그가 원망에 매몰되었더라면 노량에서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말 안하고 그런 무서운 침묵을 가지고 있으신 분이니 그렇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훈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소설이 '미완성'이라며 "그 분만이 아실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알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정리했다.
하지만 김훈은 주어와 동사만을 가지고 쓴 이순신의 깔끔한 문장에 대한 놀라움에 대해 전하면서도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이런 것이 참 답답한 것이죠"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충무공이 돌아가시기 불과 몇일 전 쓴 마지막 한 문장인 누가 군대에 군량을 바쳤다라는 일기를 읽은 김훈은 "구국의 영웅이 이렇게 가난한고 겸손한 글을 남기고 가는 것을 보고 나는 울었다"고 말하며 "'이 문장은 정말 가슴을 찢는구나'라고 느끼며, 영국의 워즈워스의 시보다 훨씬 인간의 진심이 담긴 문장이 아닌가 싶었다"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김훈은 칼의 노래 전후의 변화에 대해 "매우 간결한 문체를 뼈대로 하는 글"이라며 "그 전엔 길고 난잡한 글을 썼다. 난중일기의 장군의 문체가 나를 압도적으로 지배했다. 한 칼로 베어 쳐버리는, 형용사나 부사가 전혀 없는 이런 문체를 따라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칼의 노래가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와 사랑을 받는 이유에 대해 "야만적인 상황들을 묘사했는데 대중들이 따라와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라며 "독자들도 내면에 똑같은 고민과 갈등이 있기 때문에 저의 글을 따라왔던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배운 것 보다 충무공에서 배운게 훨씬 많다는 소설가 김훈은,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날은 충무공이 적의 유탄을 맞고 순국한 관음포 앞바다 이락사에 가서 소주 한잔 올려놓고 오직 혼자서 제사를 지낸다고 전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강연이 진행된 충무공 옛집은 충무공이 21세에 혼인해 물려받은 처갓집이며 1576년, 당시 32세 때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이곳에서 무예를 연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