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박사
저자 고정희는 1981년 독일 유학길에 올라 베를린 공과대학 조경학과에서 Water-City 개념이론으로 석사 학위, 20세기 유럽조경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베를린에서 10년간 도시설계 및 조경 디자이너로 근무했으며, 2004년 귀국 후에는 ‘고정희 조경설계연구소’와 ‘Third Space’를 운영하기도 했다. 현재는 다시 독일에 머물며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집필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사람과 식물과의 내면적 교감이라고나 할까요. 직업상 늘 식물과 함께 하다보니 저절로 교감이 형성되더군요. 식물이라는 것이 결코 의식 없는 미물이 아니라 그 반대로 어마어마한 신비를 지닌 존재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작은 씨앗 한 알이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 너무나도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 달콤한 열매를 맺는 것, 모두가 실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이 기적이 우리를 먹여살리고요. 바로 우리 눈앞에서 매일 이런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데 눈 뜨고도 이를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이 안타깝게 여겨졌습니다.
기적을 기적이라고 느끼는 순간부터 삶이 훨씬 풍요롭고 행복해집니다. 그 행복감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정원, 식물뿐만 아니라 신화와 역사, 문화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으신데, 신화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신화는 어려서부터 무조건 좋아했지요. 식물도 마찬가지고요. ‘정원에 앉아서 역사 책 읽는 아이’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오래된 것에 관심이 갔습니다. 계기는 따로 없고 그저 성향인 것 같습니다.
내 삶의 여정을 돌아보면 기억의 길목에 늘 나무가 서 있지요. 수학여행에 대한 기억은 경주의 적송으로 남아 있고 대학 시절 데이트 하던 기억은 들판에 홀로 서 있던 붉게 물든 감나무로 남아 있고…, 뭐 이런 식입니다. 문화, 신화, 역사, 예술에 두루 관심이 있었고 이걸 모두 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정원이라고 보았습니다.
왜 신은 사람에게 근사한 집을 지어주지 않고 정원을 만들어 주었을까. 바로 이 질문에서 모든 게 출발한 것 같습니다. 만약에 신이 최초의 인간에게 정원이 아닌 ‘집’을 지어주었다면 건축학을 전공했겠지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화행위가 정원 조성이었고, 가장 오래된 설치예술이 정원이었습니다.
가장 애착을 갖고 쓴 부분과 그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한 문장 한 문장 모두 애착을 가지고 써서…, 테마로 본다면 ‘식물이라는 코드로 읽어내는 신화이야기’입니다. 준비를 하면서 살펴보니 참 안타깝더군요. 우리는 건국신화만 남겨놓고 정작 중요한 창세신화를 버린 민족입니다. 신화를 버리고 국가와 관념을 선택했지요. 거기 지속적으로 양분을 공급해 줄 뿌리가 없으니 성장을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문화의 뿌리가 신화라고 봅니다. 물론 남의 신화가 아닌 내 신화여야 하겠지요.
각 문명의 신화 속에 식물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신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고요. 왜 그럴까? 식물에서 혹은 사람과 식물과의 관계에서 해답을 찾아보았습니다.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더군요.
식물에 새겨져 있는 문화 바코드 읽기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나무도시 발행 | 고정희 지음 | 303쪽 | 가격 16,800원
“우리 신화 속의 식물을 보니 우선 마늘과 쑥이 보였다. 박달나무도 있었다. 그리고 흔적이 끊겼다. 그래서 찾기 시작했다. 우리만 유독 식물을 등한시했던 걸까?”
유럽인들이 우리와 달리 신화를 두고두고 우려먹는 것과 식물을 신성시하며 사는 것이 결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던 필자는, 우연히 1920년대 그려진 단군의 초상이 영락없는 나무신의 모습인 것을 보고 큰 기쁨을 느꼈단다. ‘아, 우리에게도’ 그리고 그것이 책을 집필하게 된 시작이었다.
신화와 식물의 이야기, 인류와 친근한 식물들이 과연 인류의 역사에서, 또한 문화에서 어떤 교감을 이루어왔는지 서구권은 물론 한국의 오랜 이야기들까지 파헤친다.
아주 아주 먼 옛날에 세상이 어지럽던 시절,
사람들이 모두 앞을 못보게 되었다.
이를 가엾게 여긴 옥황상제가 한 아름다운 선녀에게 명을 내렸다.
“너는 세상에 내려가 사람의 딸로 태어나 사람들의 병을 고쳐야 한다.”
이렇게 사람의 딸로 태어난 선녀는 심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심청은 때가 되자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왜냐하면 연꽃으로 더 아름답게 태어나기 위해서였다.
연꽃은 하늘나라의 꽃이기 때문에 그 힘을 빌려 아비의 눈을 고치는 기적을 행했다.
그뿐 아니라 앞 못 보는 모든 사람들의 눈을 다 뜨게 해 주었다.
그리고는 어여쁜 날개옷을 떨쳐 입고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식물을 중심 코드로 한 ‘새로운 심청전’이 묘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렇다고 남의 이야기를 뒤집어 읽어 주는 그런 소설류의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지극히 사실적이고 역사적이고 문헌적인 정보들이 바탕을 이룬다.
수로부인의 진달래, 마고여신의 복숭아나무, 유화부인의 버드나무, 심청의 연꽃처럼 우리의 신화와 전설에 담겨있는 식물은 물론,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라는 누명을 쓰게 된 사과나무와 비너스의 눈물이 변해서 생겨난 양귀비, 게르만 족에게 거의 유일한 나무로 추앙받았던 마가목 등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인류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신화와 예술 작품, 이를 테면 그리스 신화와 셰익스피어의 희곡, 삼국유사와 심청전, 보티첼리와 푸생의 그림,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등에 등장하는 여러 식물들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분석은 식물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되돌아보게 하고, 문화의 원류가 무엇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정원을 전공하고 조경업에 오랜 동안 종사한 경력 때문인지 식물에 대한 매우 해박한 지식이 바탕이 되고 있으며, 역사와 신화, 심지어 전 세계의 식물과 관련한 문화와 관습을 꿰뚫고 있는 듯해 읽는 내내 필자의 인문학적 통찰력에 압도당한다.
박광윤 기자 pky@imwoo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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