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강병철 기자 = 일본의 고노(河野)담화 검증으로 멈칫했던 한일 외교채널간 교류가 다시 재개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정상회담을 포함, 한일간 적극적인 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일본 내에서 강하게 나오고 있다.
한일 국교정상화 50년을 한 해 앞두고 최악의 상태인 양국 관계를 이대로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일본 내 인식에 따른 것으로, 관계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일본의 행동이 어떻게 나올지 관심이다.
일본 정계의 한 주요인사는 최근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와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때까지는 한일 양국의 두 정상이 복도에서 만나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하는 것 말고 제대로 된 대화를 건설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인사는 일한협력위원회 초청으로 지난 15∼17일 일본을 찾은 한국 중진 언론인단과의 면담에서 이같이 밝혔다.
일본의 다른 한 원로 정치인도 "국가 대 국가의 우호는 결국 시작도 끝도 정상간의 관계"라면서 "정상의 행동을 언론, 국민이 본다"면서 정상간 대화 필요성을 제기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도 지난 17일 방일 언론인단과 만난 자리에서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어려운 문제가 존재하고 있지만, 문제가 있을수록 솔직한 의견교환을 해야 한다"면서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의욕을 보였다고 일본 언론이 보도한 바 있다.
대외적으로 일본의 대화 의지를 강조한 이런 대화론은 과거에도 계속됐던 것이지만, 일부 다른 점도 있다는 평가다.
우선 자민당 내각의 2인자로 꼽히는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이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움직일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방일 기간에 한국 중진 언론인단을 만난 일본의 한 정치인은 "아소 부총리가 (한일관계) 전면에 나서 잘할 것이다. 가을에 한국에 갈 것이다"고 전했다.
실제 아소 부총리가 움직이면 아베 내각 차원의 의지가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아소 부총리가 한일관계 개선의 도움이 될만한 보따리를 갖고 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2012년 8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독도 방문 등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됐으나 같은 해 9월 APEC에서 양국 정상간 만남이 성사됐을 당시에도 아소 부총리가 물밑에서 역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이달말 일본 공명당 소장파 의원 5명이 한국을 찾는다. 10월에는 한일 및 일한의원연맹 의원들이 서울에서 대규모 합동총회를 갖고 양국 관계 정상화 방안을 논의하는 등 관계를 개선을 모색하는 다른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1.5 트랙(반관반민) 정책대화를 계기로 한 한일 외교부 담당 과장의 만남(15일), 한일 6자회담 수석대표 회담(16일)에 이어 23일에는 한일 국장급 협의가 재개되는 등 한일 외교채널간 교류가 활성화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같은 흐름으로 분석된다.
또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일본판 NSC)의 후나코시 다케히로(船越健裕) 참사관이 지난 5월에 이어 다시 방한, 21일 정병원 외교부 동북아국 심의관 등을 만나 미일간 집단자위권 협의 동향과 일본의 방위정책을 설명하는 등 실무 차원의 한일간 안보 문제 협의가 계속되고 있다.
한일관계와 관련, 또 하나 눈길을 끄는 부분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지도자 그룹의 인식이다.
일본의 주요 인사들은 방일한 한국 언론사 간부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측이 (일본에 대해) 군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대응해달라고 주문했으며 일본도 피할 생각이 없다"(일본 자민당 의원), "위안부 피해자의 요구는 존엄회복이라고 생각한다. 배상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니다"(일본 민주당 의원)는 등의 말을 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는 게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기는 하지만, 이런 말들은 일본 내에서도 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일 관계 개선의 관건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런 인식이 정책으로도 반영돼 일본이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진정성을 갖고 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정부도 다음달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계기에 한일 외교장관 회담 개최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지는 등 만남의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는 상태다.
문제는 만남의 형식을 높이고 회동을 통해 양국 관계의 미래를 이야기하려면 적어도 만난 뒤 "일본으로부터 뒤통수 맞을까 걱정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정부 내 솔직한 분위기다.
지난해 12월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전격 참배했을 때 정부 내에서 "결과적으로 한일간 정상회담을 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는 말도 나왔다.
이런 차원에서 정부 내에서는 한일간 관계 악화가 구조화되는 것을 막으려면 우리가 외교적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일본이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이 나오고 있다.
과거사와 역사인식 문제 등에 대한 일본측의 태도 변화로 건설적인 대화가 가능한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21일 "한일이 만난 뒤 일본이 도발하고, 다시 관계가 후퇴되고 하는 시시포스 신화처럼 되면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면서 "일본이 결자해지 입장에서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