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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루블화로 채무상환' 조치에 기업들 추가 타격 불가피

러시아 정부가 한국을 포함해 비우호국가로 지정한 나라에 대해 러시아 기업들이 외화 채무를 루블화(RUB)로 상환할 수 있도록 함에 따라 국내 기업들의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러시아 현지에서 루블화로 주로 거래해온 국내 기업들은 루블화 가치 폭락으로 이미 큰 환 손실을 본 상황에서 달러로 받아야 하는 기존 수출대금까지 루블화로 받게 돼 추가로 피해를 볼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각에서 이번 조치는 러시아가 사실상 채무불이행(디폴트) 상황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어 자칫 국내 기업들이 아예 수출대금 등을 떼일 가능성도 커졌다는 우려도 나온다.

▲루블화 폭락 …"러시아, 채무불이행 가까워져"

8일 외신과 업계에 따르면 러시아는 전날 한국을 포함해 미국, 영국, 호주, 일본,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등을 비우호국가로 지정하고, 이들 국가에 채무를 지고 있는 러시아 기업 등은 러시아 통화인 루블화로 채무 이행을 해도 된다는 정부령을 발표했다.

이번 조치는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와 관련해 대(對)러시아 제재에 동참한 국가들에 대한 제재 차원이다.

그러나 루블화 가치가 폭락을 거듭하는 상황에서 루블화로 채무를 갚겠다는 것은 사실상 '갚지 않겠다'는 뜻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CNN에 따르면 전날 미국 달러당 루블화는 155루블까지 치솟았다. 블화 가치는 연초 이후 미국 달러화 대비 90% 폭락하며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루블화 환율은 우크라이나 침공 전까지 달러당 80루블 아래였으나 서방의 고강도 경제 제재 이후 급락하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루블화 가치가 폭락한데다 추가로 더 폭락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러시아의 이번 조치는 제재의 의미도 있지만, 사실상 채무 불이행 상황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면서 "러시아와 거래하는 우리 기업들은 채무불이행 위험의 피해에 노출돼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러시아의 디폴트 가능성은 꾸준히 거론되고 있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 등 3대 국제신용평가들도 러시아 신용등급을 '국가부도' 직전까지 강등시켰다.

S&P는 러시아의 달러화 표시 장기국채 등급을 'BB+'에서 일제히 'CCC-'로 낮췄다. CCC-는 원금과 이자 상환 가능성이 의심스러운 수준으로, 국가 부도를 뜻하는 D등급보다 두 단계 위다.

루블화
[AP/연합뉴스 제공]

▲기업들 "환차손에다 돈 떼일 위험까지"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러시아와 거래를 하는 국내 기업들은 러시아의 외화채무 루블화 상환 허용에 따라 일부 손해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사태 이전에 맺었던 채무 관계와 관련해 거래대금을 달러화로 받아야 하는데 루블화로 받게 되면 당연히 손해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최근 러시아와의 교역 규모가 상당히 축소된데다 러시아 현지 생산 물량은 애초부터 루블화로 거래해온 만큼 타격이 예상보다 크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전자의 경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이후 루블화 폭락과 현지 해상 물류 차질이 발생하면서 러시아로의 수출 자체가 중단된 상태다. LG전자는 러시아 수출 물량이 거의 없고 대부분 현지 생산에 의존한다.

삼성전자는 모스크바 인근 칼루가 지역 공장에서 TV를, LG전자는 모스크바 외곽 루자 지역 공장에서 가전과 TV를 각각 생산 중이다.

조선업체들은 주로 헤비테일(선수금을 적게 받고 인도 대금을 많이 받는 형태의 계약) 방식으로 장기 건조계약을 체결하는데 루블화로 계약금액을 지불하면 손실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빅3' 조선업체인 한국조선해양과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은 2020년 말 이후 러시아로부터 LNG 운반선 총 7척을 수주했고, 삼성중공업은 현지 즈베즈다 조선소와 장기 설비공급계약도 맺었다. 이들 조선업체와 러시아의 거래금액은 7조원이 넘는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루블화 가치 하락으로 손실이 예상된다"면서 "다만 건조금액의 상당액이 이미 상환된 상태이고, 또 러시아 정부가 발주했더라도 그 배를 용선하는 일본이나 캐나다 소속 해운업체가 발주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아 파급효과는 예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완성차 현지 판매 대금뿐 아니라 부품 등 납품 대금 결제가 모두 루블화로 이뤄지는 자동차 업계는 이미 루블화 폭락으로 큰 손실을 본 상황이다.

한 부품업계 관계자는 "현지 업체들은 대부분 루블화로 납품 대금을 받아 국내로 송금해왔기 때문에 이미 환차손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한 상황"이라며 "러시아 수출길까지 막혀 선적한 물량을 되돌려 오는 업체들도 많다"고 말했다.

완성차 업계 관계자도 "루블화 환율이 50% 이상 하락하면 수익성 측면에서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라며 "현재로서는 자동차가 판매돼도 루블화로 결제하기 때문에 잘 팔려도 문제고, 생산이 멈춰 물량 공급이 안 돼도 문제인 상황"이라고 전했다.

항공업계는 러시아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받을 거래 대금이 많지 않아 당장 큰 영향은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대한항공의 경우 러시아 현지에서 여행사를 통해 모스크바~인천 노선 항공권을 판매할 때 루블화로 대금을 받을 것으로 보이지만, 다음 주까지 해당 노선 운항이 중단돼 거래 자체가 없는 상황이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모스크바 공항의 급유 문제로 모스크바 화물 노선 운항도 일시 중단한 상태다.

다만 러시아의 이번 조치로 모스크바 노선 운항 중단이 장기화할 가능성도 커졌다.

아울러 러시아가 한국 항공사를 상대로 영공 통과를 금지할 경우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유럽행 항공편의 항로를 조정해야 한다. 남쪽 우회 항로를 이용하면 연료비가 기존 항로 대비 20%가량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