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서방의 제재에 맞서 단행한 기술·통신·의료장비 등의 수출제한 조치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국내 산업 공급망에도 영향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우리나라를 비우호국가 명단에 포함시킨데 이어 수출제한 조치까지 취하면서 실물경제 리스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는 원자재 및 에너지 공급망 안정성 강화를 위해 총력 대응에 나서는 한편 필요하면 매점매석 금지, 긴급수급조정 등 시장 안정화 조치를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11일 서울 종로구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 박진규 제1차관 주재로 '제21차 산업자원안보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열고 러-우크라 사태 동향을 공유하고 대응현황을 점검했다.
▲에너지·공급망 타격 심화…러·우크라 수출 감소세 전환
이날 회의에는 자동차·조선·반도체·철강·가전·석유화학 등 산업별 협회와 석유공사·가스공사 등 에너지공기업, 무역협회·무역보험공사·코트라·전략물자관리원 등 유관기관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우리 실물경제가 아직 잘 버티고 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현장의 애로가 점차 가시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에너지의 경우 장기계약 중심으로 도입하고 있어 수급과 관련해 특이 동향은 없고 충분한 재고·물량도 확보해 국내 수급 영향은 아직은 제한적인 것으로 파악됐다.
다만 미국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 조치 등에 따라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이다.
특히 유가가 배럴당 130달러를 돌파하는 등 에너지 가격의 상승세 지속으로 국민부담도 가중되고 있다. 전국 휘발유 평균가격은 지난 9일 L(리터)당 1천892.4원을 기록하며 2013년 10월 이후 최고가를 경신한 데 이어 지속해서 상승해 이날 오후 2시 기준으로 1천933.38원을 나타내고 있다. 서울의 경우 L당 2천11원으로, 2천원 선도 돌파했다.
공급망과 관련해선 기업의 선제적인 재고 확보와 대체선 발굴 노력에 힘입어 주요 품목의 수급이 아직은 원활히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해 기업의 채산성 저하가 우려된다. 니켈 가격은 지난해 t(톤)당 1만8천달러에서 올해 1∼3월 평균 3만4천달러로, 무연탄 가격은 작년 기준 t당 137달러에서 올해 2월 249달러로 각각 올랐다.
여기에다 앞으로 러시아의 특정 품목 수출 금지·제한 조치까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상황이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러시아 정부는 전날(현지시간)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회원국과 압하지야, 남오세티야를 제외한 모든 국가(우리나라 포함)로의 특정 품목 수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대상 품목은 기술장비, 통신장비, 의료장비, 차량, 농기계, 전기장비, 철도차량, 기관차, 컨테이너, 터빈, 가공 기계(금속 및 석재), 모니터, 프로젝터, 콘솔 등 200개 이상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러시아가 비우호국가로 지정한 48개국에는 특정 유형의 목재 수출까지 제한됐다.
이 조치는 올해 12월 31일까지 적용되며, 구체적인 내용은 추후 발표될 예정이다.
수출의 경우 우리나라 전체 수출은 지난 1∼9일 기준으로 전년 동기 대비 10.4% 증가하며 양호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전시 상태인 우크라이나와의 교역은 사실상 중단됐고, 러시아로의 수출 역시 대금지급 및 물류 관련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감소세에 접어드는 양상이다.
지난 1∼9일 기준 대(對)우크라이나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98.9%, 대러시아 수출은 6.6% 각각 줄었다.
▲금융결제·물류 기업애로 잇달아…車·조선업종 피해 커
금융결제·물류와 관련한 기업들의 애로도 정부 지원창구를 통해 꾸준히 접수되고 있다.
선박제조 기업 B사는 결제대금 송금은행이 미국의 특별지정 제재대상(SDN)으로 지정돼 대금 입금이 지연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러시아에 연간 300억∼400억원 규모의 수출을 해 온 음료 제조기업 E사는 서방이 러시아 은행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퇴출키로 한 조치를 발표한 이후 3월 선적물량을 모두 취소하는 등 대러 수출을 잠정 중단했다.
가전 기업 F사는 주요 선사의 신규운송 중단, 철도운송 일부 구간 중단, 항공화물 수송 중단 등 물류차질이 장기화돼 부품수급이 막히면 현지 생산라인 가동을 멈춰야 하는 처지다.
특히 자동차·조선 협회는 이날 회의에서 업계 애로 및 건의 사항을 발표하며 정부의 더욱 과감한 지원을 요청했다.
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완성차업계는 글로벌 해운사의 러시아 운항 중단 등에 따른 부품조달 및 완성차 수출의 어려움과 반도체 부족난 등으로 인해 당분간 공장 재가동이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부품업계는 완성차업계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로 일부 부품공급이 어려운 상황이며, 대금결제 통화인 루블화의 가치 절하로 인한 환차손이 우려된다.
업계는 미국의 대러 수출통제 조치인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 적용면제에 따른 국내 수출통제 제도 관련 지침을 조기에 마련하고 러시아와 거래하는 부품업계에 긴급 자금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현지 기업의 루블화 리스크 보완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금융지원의 자격요건을 완화해달라고 건의했다.
조선업계는 러시아가 발주한 선박·블록에 탑재되는 일부 수입 기자재가 생산업체 소재국의 대러 제재로 인해 수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거래대금 송금은행의 SDN 지정으로 수주 잔금을 받지 못하는 상황도 생긴다고 토로했다.
업계는 대러 제재조치 관련 정보를 신속하게 공유하고 수출통제품목에 선박 적용을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건의했다. 조선사 유동성 지원을 위한 제작금융 지원도 요청했다.
산업부는 자동차·조선 업계 건의 사항을 범정부 '우크라이나 사태 비상대응 TF'를 통해 관계부처와 공유하고 지원 방향을 검토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