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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앞으로 다가온 유한양행 100년

인간의 일생을 길게 100년으로 잡는다. '100'이라는 숫자는 의미심장하다. 한 기업의 100년도 그 의미가 매우 깊다. 100이라는 숫자는 지속성과 관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00년이라는 숫자는 큰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책임감도 함께 커진다.

제약사는 옛날이나 창업했던 사업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과거나 오늘이나 약이 없으면 치료를 받을 수 없고 고통에서 놓일 수 없다. 치료제가 없었다면 코로나와 같은 감염병에서도 인간은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유한양행의 '유한'은 창업주(유일한 박사)가 자신의 성에 '한국의 백성'이란 뜻의 '한'을 달아 만들어졌다. 어릴적 홀로 미국 유학 생활을 한 유 박사는 고국에 돌아왔을 때 동포들의 어려움 삶을 직면했다. 이것이 그에게 큰 동기부여를 줬다.

"도움을 주자"라는 생각이 오늘의 유한양행에 이르게 된 시작이 됐다. 유 박사의 정신은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도움을 주자"였다. 이렇게 유한양행이 설립됐다.

유 박사는 독립 운동가다. 교육자이기도 했다. 동시에 기업인이었다. 이런 그였기에 저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고 유한양행이라는 기업의 태동이 이와 같았던 것이었다. 그는 9세의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보통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미주 독립운동 동반자는 서재필 박사였다.

1926년도에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유 박사는 종로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처음에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결핵약, 항생제 등을 미국서 수입해 팔았다. 이를 통해 최초의 서구적 제약 기업으로 발돋움 했다. 자체 제작한 소염진통제 '안티푸라민'을 선보이기도 했다.

생산 공장 및 연구소가 설립됐고 해외에 지사를 두며 사업을 키워나갔다. 1960~70년대는 유한양행의 고속 성장기 였다. 유 박사는 1971년 타개했다.

유한양행은 선진적 경영으로 제약 업계를 선도했다. 유한양행이 전문경영인 제도를 한국 기업 처음으로 도입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전문 경영인을 외부 영입이 아닌 내부 승진을 원칙으로 했다. 유한양행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대표이사가 된 대표, 30년 넘게 유한양행에서 일해온 대표 등이 유한양행을 이끌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기업 문화지만 한 사람이 오랫동안 대표 자리에 있을 수는 없다. 연임은 1회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아무리 좋은 실적을 냈어도 유한양행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한양행은 2013년 제약 업계 매출 1위 기업으로 올라셨고 2014년에는 업계 최초로 매출 1조원을 달성했다. 유한양행은 의약품 뿐만 아니라 건강기능식품, 생활용품, 동물약품 등 인류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사업에 진출해 있다. 국내 1등을 넘어 글로벌 제약사가 되기 위해 움직여 나가고 있다.

2021년 취임한 조욱제 대표이사 사장은 창립 100주년을 맞게 되는 오는 2026년, 유한양행 매출 규모를 글로벌 50대 제약사로 진입시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이를 위해서는 매출을 4조원대로 끌어올려야 한다. 유한양행은 2022년 연결기준 매출 1조7758억 원, 영업이익 360억 원을 거뒀다.

조 사장은 올 해 시무식에서 "연구개발 역량 강화와 미래 지속 성장을 위한 신규 투자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겠다"며 " 제2, 제3의 '렉라자'를 조기에 개발할 수 있도록 선택과 집중을 통해 유망 후보 물질을 도입하고 기반 기술을 확장함으로써 회사의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한양행의 트레이드마크는 '버드나무'다. 유 박사가 고국으로의 영구 귀국을 결심하자, 서재필 박사가 유 박사에게 선물로 '버들표 목감품'을 줬다. "버드나무처럼 민족이 편히 쉴 수 있는 큰 그늘이 되어라"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