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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자로서 인정받으려면 과정이 필요하다. 단역에서 시작해 조연으로, 그리고 주연급 연기자로 발돋움하는 '숙성되는' 시간. 말로는 간단히 설명할 수 있지만 쉽지만은 않은 긴 시간을 자신만의 커리어로 쌓아낸 연기자가 있다.
길면 길다고 할 수 있고, 짧다고 할 수도 있는 기간동안 연기자로서 모범적(?)인 과정을 밟아온 배우 최재환(27)을 봄바람이 부는 4월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제 막 인지도가 높아져 가는 최재환은 올해 연기생활 8년차에 접어드는 베테랑.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발레 교습소', '레드아이', '연예의 목적', '사랑을 놓치다' '비열한 거리', '각설탕', '화려한 휴가', '숙명', '비스티 보이즈', '아기와 나', '트럭', 드라마 '아이엠 샘', '마왕', '식객'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작품에만 스무 편이 넘게 출연했다.
최근에는 '카인과 아벨'에서 조연 서진호 역을 맡아 패러디 포스터가 나올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고, 영화 '국가대표'에서는 주연급 연기자로 성장했다.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자신을 "중고 신인 최재환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남원 광한루에서 영화 '춘향전'을 촬영하고 있는 임권택 감독을 만나 연기자로서의 꿈을 가졌다.
"광한루로 현장 학습을 갔는데 영화 촬영 중인 임권택 감독님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게 됐어요. 우연인지 인연인지 '내 영화 중 무얼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서편제'가 기억나더라고요. 감독님과 사진 한 번 찍은 특별할 것 없는 경험이 저한테는 뭔가 내리꽂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아. 이거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30만 원 들고 무작정 상경했죠"
◇ 단역 경험 - 가장 열정에 차 있던 시기
최재환은 막상 상경해서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를 두고 "반짝 스타로 성공할 줄 알았다"고 웃으며 솔직하게 당시의 심경을 털어놨다.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는 "그때가 가장 열심히 한 시기 같다"며 "단역부터 시작했는데 별의별 설정을 다하고 연기에 임했어요. 그냥 길을 지나가는 역인데도 '막 실연당해서 화가나 걸어가는 사람', '헬스에 심취해 계란 껍데기를 묻히고 다니는 사람' 같은 것을 생각했죠"라고 밝혔다.
감독님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설정을 시도했던 그는 "몸은 정말 힘들었는데, 정신적으로는 힘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경험했던 연기가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는 느낌이랄까"라고 말했다.
◇ '배우 최재환'이 새겨진 작은 의자 - 친구들이 더 좋아하더라
최재환의 미니홈피를 들어가 보면 작은 의자 사진이 걸려있다. 영화 '국가대표'를 하며 자신만의 의자가 생긴 것을 기념해 찍어 놓은 사진이다. 한 명의 당당한 배우로서 인정받았다는 상징에 대해 최재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 그런 것들을 상상하며 즐거운 위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상상만으로도 '으쌰으쌰'하던 게 실제로 왔다는 생각을 하니까 벅차더라고요. 학교에서 상 받은 기분이었고"라고 밝혔다.
게다가 친구들이 자신보다 더 기뻐해 줘 감동이었다는 최재환은 "'니가 뭐 연기냐'고 말하던 친구들도 전화를해서 사투리로 '정말 해낼 줄 알았다'라고 더 좋아해 주더라고요. 원래 감동해도 눈물을 안 흘리는 스타일이라 울지는 않았지만 저절로 온몸이 떨리더라고요"라고 당시의 벅찬 감동을 전했다.
◇ 가장 기억나는 배역은? - '화려한 휴가' 병조, '비열한 거리' 명구
상업영화만 19편을 찍었다는 최재환은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로 '화려한 휴가'와 '비열한 거리'를 꼽았다. 두 영화 모두 최재환이 결정적인 장면에 주인공이 됐던 영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화려한 휴가'에서 백치 병조 역을 맡은 최재환은 시위자들과 군인들이 대치한 상태에서 '충성'을 외치며 뛰어 논다. 화염병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긴박한 장면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놀다가 죽는 그의 모습은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명장면.
최재환은 "'화려한 휴가'를 통해 연기에 대한 새로운 눈을 얻었다"며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바보 역을 완벽히 소화하고자 영화 '아이엠샘', '마라톤'을 보는 것은 물론이고 사전까지 뒤지면서 고민했다고.
최재환은 "감독님이 열심히 하라고 뽑아주신 것 같은데 정말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한 선배가 '너를 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이야기 해주시는데, 추상적인 그 말에서 '아. 그렇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최대한 저를 버리고 대본에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려고 했죠"라고 밝혔다.
"마지막 에필로그 장면은 원래 시나리오에는 없던 장면인데 새로 생겼어요. 딱 두 번 리허설을 하고 오케이 사인을 받아 연기에 들어갔죠. 촬영이 끝나니까 모두 박수를 쳐주시는 거예요. 그날의 마지막 컷이라 그랬던 걸지도 모르지만 왠지 저에게 해주시는 느낌이 들어서 희열이 느껴졌다고 할까."
최재환에게 인상깊은 배역은 병조 역뿐만이 아니다. 그는 영화 '비열한 거리'의 명구 역도 언급하며 "유하 감독님은 저의 은인이시다"라고 털어놨다.
"처음으로 두 작품('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를 함깨한 감독님이예요. 감독님은 제게 영화의 재미와 의미를 알려주신 분이고요."
조인성이 맡은 병두를 배신하는 막내 명구 역을 맡았던 최재환은 "병두를 찌르는 장면은 제가 아니고 진구(종수 역)형이 하는 부분이었는데 유하 감독님이 갑자기 바꾸셨어요"라며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감독님이 갑자기 전화하시더니 '인성이는 니가 찌르는 거다. 일주일 있다가 할 거니까 준비해둬'라고 하시더라고요. 다들 제가 '연기력 검증이 안됐다'라고 반대하셨는데 말이죠"라며 숨겨진 사연을 밝혔다.
이어 "제 사연이 만약 영화였다면 누구보다 완벽한 연기를 하는 스토리가 나왔겠지만 저는 디테일적인 면에서 실수를 했거든요. 마네킹에 칼을 찌르고 나서 그냥 뺐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쉽게 안 빠진다고 하더라고요"라며 "마네킹에게 죄송한거죠. 다시 옷을 입혀서 찍어야 했으니까"라며 웃으며 덧붙였다.
◇ 존경하는 배우는 임창정 - 생활에 직간접적 도움?
개인적으로도, 배우로서도 임창정을 좋아한다고 밝힌 최재환은 그를 롤모델로 선택하게 된 재미있는 사연을 공개했다.
최재환은 "실은 임창정 선배의 연기를 오디션에서 선보여서 캐스팅된 적이 많아요. 한창 오디션을 보고 다닐 때 영화 '시실리 2km'의 한 장면을 일인 다 역으로 선보였는데 다들 '그걸 어떻게 다 외웠냐'며 좋아하시더라고요. 그 장면만 몇백 번 본 것 같아요"라며 "생활할 수 있게 직간접적으로 도와주신 분이 임창정 선배죠"라고 웃으며 즉석에서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또 최재환은 임창정의 '소주 한잔'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한 일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선배를 코믹 연기만 하는 분인 줄 알았는데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에서 올백 한 선배의 모습에서 강렬한 포스가 느껴지더라고요"라며 "'그 사람이 맞아?'라고 생각했을 정도"라고 밝혔다.
정말로 멋있었다며 임창정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던 최재환은 "정말로 꼭 작품을 같이하고 싶어요. 그리고 술도 얻어먹으면서 인생상담도 하고 싶고요"라고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 연기란?- 신선한 요리와 같은 것. 아직도 시작점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제 8년차 연기자에 접어든 최재환은 "연기를 잘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단지 화려한 외모가 아니니까 연기를 잘하는 것처럼 느끼시는 것 같다"고 겸손함을 드러냈다.
그는 "처음 연기 시작했을 때에 배해 엄청난 위치 변화가 생겼어요"라고 말하면서도 "아직도 시작점에 있고 출발은 언제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연기하면서 계속 시작점에 있지 않을까. 나이를 먹더라도 어딘가 나아간다기 보다는 '저걸 어떻게 해야 잡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연기를 하면 할수록 열의와 욕심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또 최재환은 '연기는 무엇인 것 같냐'라는 질문에 "식객의 영향인 것 같은데 연기는 요리 같아요. 신선한 재료만 모아서 양념하고, 먹는 사람 앞까지 그대로 전달하고 싶어요"라며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처럼 오버하는 연기보다는 신선하고 담백한, '실제 감정에서 우러나는 연기'를 하며 관객분들의 즐거운 표정을 보고 싶다고 할까?"라고 전했다.
요즘에는 공감 가는 악역을 맡아 연기폭도 넓히고 싶고, 연극에도 도전해 체계적인 연기를 배우고 싶다는 최재환. 그만의 신선한 연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