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별을 보며 나가 한밤중에 집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축 쳐진 어깨와 피곤함에 절은 얼굴, 넥타이가 느슨하게 풀린 채 얼큰하게 취기 오른 모습, 그는 바로 우리들의 보통 '아버지'다.
군대에 다녀오고 꽉 찬 나이에 떠밀려 결혼을 생각할 즈음, 어느 날 문득 초라해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눈물샘이 무거워지고 가슴 또한 먹먹해졌던 경험들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빠'라고 불렸던 그 시절에도 이런 뜨거운 마음이 들었을까. 어쩌면 술에 취해 늦은 밤 귀가한 아버지의 모습이 마냥 정겹기만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혹시 자고 있던 딸아이가 예뻐 보여 뽀뽀를 하려는 찰라, 인기척을 듣고 잠에서 깬 아이가 "아빠 술 냄새 싫어"라고 뒷걸음질 치며 당신을 밀어낸 경험은 없는가.
■술주정 아빠 훈계 무조건 반발심
최근 소아·청소년전문 아이 누리 한의원이 '아빠의 음주습관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고등학생 22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30%(66명) 응답자의 아빠가 가족에게 술주정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24일 밝혔다.
술주정 아빠를 둔 66명의 응답자 중 85%는 술을 마셨거나 취한 아빠로부터 훈계를 받으면 '무조건 반발심이 생기거나 듣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또 42%(28명)는 술 취한 아빠에게 맞아본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아울러 전체 221명 응답자 가운데 아빠가 '한 달 동안 술을 마시고 취한 횟수'에 대해서는 1번이 30%(66명)로 가장 많았으며, 2~3회가 25%(54명), 6회 이상 14%(31명), 4~5회 10%(23명)를 기록했다. 술 취한 적이 없다는 응답은 21%(47명)에 그쳤다.
고교 1학년 박 현우(17세)군은 "요즘 송년회 모임이 많은 아빠가 술을 마시고 늦은 밤에 크게 인기척을 내고 집에 들어올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데, 초등학교 6 학년 때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술 마신 아빠한테 빗자루로 맞은 후부터 그런 증상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아이 누리 한의원 안산점 이주호 원장은 "자녀들이 술 마신 부모로부터 폭행을 당하면 트라우마(Traumaㆍ정신적 외상)를 입게 되는데, 성장장애는 물론 자칫 우울증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를 유발시킬 수 있고 성인이 돼서는 단체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등 사회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또 18%(40명)는 '술 취한 아빠를 보고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고 응답하는 등 아버지의 음주습관이 성장기의 소아·청소년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고교생 4명 가운데 3명 '음주했다'
실제 응답자들 4명 가운데 3명은 술을 마셔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처음 술을 마신 시기에 대해서는 고등학교가 37%(82명)로 가장 많았으며, 중학생30%(67명), 초등학교 고학년5%(11명)·저학년3%(7명)순이었다. 마셔본 경험이 없는 응답자는 불과 25%(54명)였다.
첫 술을 함께 마신 상대로는 친구가 39%(86명)로 가장 많았지만, '아빠한테 술을 배우고 싶었다'는 응답도 43%(96명)를 차지해 눈길을 끌었다.
이주호 원장은 "주도(酒道)는 술을 가르치는 것부터가 아니라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되는데도 불구하고 부모가 나쁜 술버릇과 술주정을 자녀에게 들켰다면 그 모습 그대로 각인돼 충분히 유전될 수 있는 부분이 크다"고 지적했다.
한편, 얼마 전 미국 버지니아 주립대 연구팀이 4,731명의 핀란드 10대 청소년과 부모를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 결과에서도 청소년들이 과도하게 술을 마시는 부모의 모습을 본받아 같은 음주습관을 가질 위험이 큰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
이주호 원장은 "혹시라도 나쁜 술버릇을 아이에게 들켰다면 대화를 통해 아빠의 실수를 인정하고 이해시켜야 잘못된 배움이 뒤따르지 않고, 휴일에 잠만 자는 아빠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모습을 통해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