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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 행복나눔 신영균, 진정한 예술인의 ‘혼’

원로배우 신영균(82)씨가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500억원 상당의 재산을 기부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서울 중구 초동의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국내 최대 영화박물관인 제주신영영화박물관을 영화계 및 문화예술계의 공유재산으로 기증하는 방식이다.

이번 기부와 관련해 그의 지인들은 “신영균은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검소한 생활을 하며 원로배우들의 정기 모임을 주선하고 형편이 어려운 동료들을 남몰래 후원해왔다”고 전했다. 올초엔 아이티 지진피해 주민 돕기 성금으로 국제구호개발NGO 굿네이버스에 10만 달러를 쾌척하기도 했다.

그의 이번 500억 사재 기부 또한 우리 사회의 나눔 기부문화의 확산과 정착에 크게 일조할 것으로 보여진다.

◇시대 풍미한 ‘파란만장’ 그의 삶

신영균은 1928년 11월 6일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1955년 서울대학교에서 치의학 학사를 취득해 치과의사로 활동했다.그는 졸업 후 조긍하 감독의 <과부>(1960)로 데뷔했는데, 그의 배우 생활은 출발만큼 화려하고 당당하게 이십년 가까이 이어졌고, 우리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된다.

그는 또한 총 294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다양한 연기 세계를 구축했는데, 데뷔작 <과부>(1960)에서 과부를 사모하는 연정으로 속앓이를 하는 촌사람 역을 실감나게 보여줬다. 이와 함께 <마부>(1961)나 <상록수>(1961)에서의 가장이나 맏아들의 듬직한 역할도 연기했으며, <남과 북>(1965), <빨간 마후라>(1971)을 비롯해 다수의 전쟁과 군대를 소재로 한 영화에 출연하며 특유의 의리있는 군인역을 연기해내기도 했다. 

특히 그의 연기 중, 연산군 배역은 대중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폭군 연산>과 <연산군>에서 같은 역할을 2번이나 했는데, 이는 당시의 연기자 가운데에서도 풍채에 가장 잘 어울리고 폭발적 에너지가 느껴지는 그의 연기력 덕분에 가능했다.
기막힌 영화적 삶을 살다간 연산군에 대한 영화화는 우리 영화사에서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으며, 연기자라면 한번쯤 욕심을 내는 매력적인 역할로 알려졌다.
이러한 연산군의 연기사에 있어, 신영균은 자신만의 독특한 연기세계를 구성하며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는 또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으로도 뚜렷이 기억되고 있는데 1968년에 시작해 1971년에 이르러 완결이 이루어지는 <미워도 다시 한번>이 그것이다. 여기서 신영균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하고, 나중에 옛 사랑과 아들이 나타남으로써 갈등을 겪는 삼각관계의 중심에 선 중년 남성 역을 멋지게 소화해낸다. 이 시리즈는 한국영화사에서 대단히 성공적인 영화로 기억되며, 전국적인 흥행을 기록한 영화다. 특히 중년 여성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며 극장가를 휩쓸었다.

영화인으로서 1962년도에 제9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제1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1964년도에도 역시 아시아영화제와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69년에는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1960년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남자배우로 손꼽힌다.

신영균은 오랫동안 함께 작업을 같이 했던 김수용 감독과 <화조>(1978)를 끝으로, 연기 일선에서 물러나 극장을 경영하고, 한국영화인협회 회장을 거쳤으며, 1981년에는 신영문화예술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에서는 단편을 상대로 하는 신영영화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1년에 이어 1996년에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의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대중문화와 영화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7년엔 대통령 동백훈장, 2007년 대종상영화제 영화발전공로상, 2008년 대한민국 영화대상 공로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예술계 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서의 발자취도 남겼다. 그는 제15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6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

인물자료참고 = 맥스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