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일보 안진석 기자] 금융당국이 이번에 은행권 가계대출에 급제동을 건 것은 당국이 내놓은 여러 가지 대책에도 불구하고 은행권 가계대출이 오히려 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지난 6월 가계부채 종합대책을 내놓은 데 이어 지난달 세부 지침까지 마련했지만, 은행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가계대출 취급 규모를 무서운 속도로 늘리자 이번에 정부가 칼을 빼들고 가계대출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에 나선 것이다.
당국은 이번 조치에 대해 가계대출의 이같은 비정상적인 증가세가 대출금리와 부동산시장의 급변에 따라 언제든지 우리 경제의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또 전체 가계부채의 규모가 지나치게 커지면 실물경제로 고루 분배되어야 할 자금 배분이 왜곡될 수 있다는 점도 극약처방을 하게 된 배경이다.
그러나 대다수 은행이 갑자기 예고도 없이 가계대출을 끊어버린 탓에 일선 대출창구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또 꼭 필요한 일을 위해 돈을 급하게 마련해야 하는 실수요자에게 피해를 줄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래 저래 가계대출 전면중단 조치는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최근 들어 무섭게 불어나는 가계대출
이번 가계대출 전면중단의 원인은 최근 들어 무섭게 불어나고 있는 가계대출에 있다. 한국은행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지난 5월 말 현재 국내 은행의 가계대출은 440조9천억원이며, 은행을 포함한 전체 예금취급기관의 가계대출은 612조3천억원으로 집계됐다.
은행권의 가계대출은 경기상황과 자금수요 등에 따라 증감하지만, 최근 3년6개월 간 평균 증가폭은 매월 1조9천억원이었다. 그런데 지난달 가계대출은 이를 훌쩍 웃도는 2조2천억원이 늘어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달 들어서는 불과 2주 만에 가계대출이 1조5천억원이나 급증했다.
은행을 포함한 전체 금융권의 가계대출 증가폭을 보면, 지난 3년6개월 간 평균 3조4천억원이었으나, 지난달 4조3천억원이나 증가했고 이달 들어서 2주 만에 평균치의 65%에 달하는 2조2천억원이 늘었다.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이러한 수치를 놓고 "최근의 가계대출은 추세적인 증가율을 한참 벗어나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며 "실물경제의 성장률을 넘는 가계대출은 위험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예금취급기관 가계대출의 전년 동월 대비 증가율은 2009년 9월 6.2%에 머물렀지만 지난해 7%대로 높아졌고, 올해는 매월 8%를 넘는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전체 금융기관의 가계대출에 신용카드 사용액 등을 모두 망라한 가계의 총 금융부채는 지난해 말 937조3천억원에 달해 부채상환능력을 나타내는 가처분소득의 146%를 차지한 것으로 파악됐다.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 금융부채 비율은 2004년 114%, 2005년 120%, 2006년 129%, 2007년 136%, 2008년 139%, 2009년 143% 등으로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겪으면서도 선진국과 달리 주택가격이 큰 폭의 조정을 받지 않았고, 이런 와중에 가계대출이 급격하게 늘고 있어 언젠가 `거품'이 붕괴할 가능성마저 있다는 게 당국의 판단이다. 한은은 지난 4월 발표한 `금융안정보고서'에서 "가계부채 수준이 이미 높은 상황에서 가계부채 증가세가 더욱 확대된다면 금융시스템 안정성이 저하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아울러 가계대출로 돈이 몰리면 실물경제에 고루 자금을 배분해야 하는 은행 고유의 기능이 왜곡돼 건전한 경제 발전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됐다고 당국은 덧붙였다. 가계대출로만 돈이 과도하게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대출 줄이라고 해도 줄이지 않는 은행에 초강수
정부는 더 이상 은행권의 대출문제를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은행권에 강도 높은 메시지를 보냈다. 지난달을 기점으로 가계대출이 급증하자 당국은 최근 시중은행 부행장들을 불러 "가계대출 증가율을 낮추라"는 구두 경고를 보냈으며, 올해 연간 가계대출 증가율을 7%로 묶지 못한 은행은 강도 높은 검사를 받을 것이라고 시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정부의 지침이 떨어지자 은행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게 됐다.
이번에 갑자기 대출을 금지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달 들어서도 농협을 중심으로 각 은행은 가계대출을 마구 늘렸다. 그러다 7.7%라는 당국의 감축 목표비율에 맞추자니 더 이상 대출을 해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서 일단 이달 말까지 가계대출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일부 은행에서는 주택담보대출뿐 아니라 각종 신용대출과 담보대출은 물론 마이너스통장 만기연장마저 되지 않도록 해버렸다.
당국은 가계대출이 급증한 배경에는 `편하게 누워서 금리차만 따 먹겠다'는 은행들의 못된 심보와 근시안적인 행태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한 당국자는 "낮은 금리로 돈을 끌어들이고 조금 마진을 붙여 연체율이 낮은 주택담보대출을 중심으로 가계대출을 늘리는 게 은행 입장에선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당장 이익을 내는 데 급급해 가계대출의 위험성이 커지는 전체 상황은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계부채 종합대책을 통해 가계대출을 억제하도록 유도하고 세부지침까지 만들어 대출 구조를 개선하려 했지만, 은행들이 계속해서 가계대출을 늘리자 어쩔 수 없이 강수를 뒀다는 게 당국의 설명이다.
◇ 갑작스런 대출금지에 부작용도 우려
하지만 대다수 은행이 갑자기 가계대출 창구를 아예 닫아버리자 대출수요자들의 불편도 커지고 있다. 농협에 대출을 받으러 갔던 한 회사원은 "창구 직원으로부터 `상담은 해주겠지만 아마 안 될 거다'라는 대답을 들었다"며 "당장 전세자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큰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금융위 관계자는 "항상 이런 식이다. 은행들이 정말 문제가 많다"며 책임을 은행 쪽에 돌렸다. 당국의 말을 무시하고 무차별적으로 대출을 늘리더니, 당국이 `위험신호'를 보내자 갑자기 대출을 확 조여서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은행의 과도한 반응도 문제이고, 사태가 이렇게 커지게 만든 금융당국도 문제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