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일보 김윤식 기자] 한국 IT 산업이 소프트웨어(SW) 기술의 부족으로 전 세계 IT 기업들로부터의 각종 특허 공세에 시달리고 막대한 로열티를 지급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KT가 한국 IT산업의 경쟁력을 살리기 위해 소프트웨어(SW)산업 활성화에 큰 결단을 내렸다.
KT는 내년부터 외부 업체가 납품한 소프트웨어의 평가 기준을 인건비가 아니라 제품의 품질과 가치에 두고 우수한 SW제품에는 그에 걸맞는 구매비를 지급할 예정이다. 또 해당 소프트웨어의 저작권도 KT가 아니라 개발사에 주기로 했으며, 국산보다 외국산 제품을 우대해온 관행도 없애기로 했다. 또 오픈마켓을 구축해 SW업체들의 세계 진출을 지원할 방침이다.
이석채 KT 회장은 29일 광화문 사옥 올레스퀘어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SW산업 활성화에 앞장서겠다며 'SW 가치판단 혁신', 'SW 개발여건 지원', 'SW 시장진출 지원'을 골자로 하는 '3행(行) 전략방안'을 발표했다.
이 회장은 "구글 등 글로벌 기업들이 SW에 주력하며 세계로 진출하는 가운데 한국의 SW 기업들이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며 "기존 관행을 깨는 우리의 전략을 시작으로 국내 SW가 세계 시장에서 활약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또 "비용 부담이 커진다고 내부에 반대 의견도 많았지만 우리가 먼저 소프트웨어 구매 관행을 바꾸기로 결정했다"며 "업계에 거대한 (변화의) 눈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 SW 가치구매 도입
KT는 전략 1행에 따라 SW를 용역개발의 하나로 인식해 SW 구매비를 인건비로 여겨온 관행을 버리고, SW의 미래성과 개발기업의 전문성 등을 기반으로 가격을 설정하는 가치구매 방식을 도입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국내 소프트웨어 개발 대금 지급 방식은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인두세 방식'이라 부르는 것으로, 투입되는 사람 수에 노임을 곱해 납품가격을 정해왔다. 노임 단가 기준은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가 정부 지원을 받아 매년 조사·발표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대졸자는 '초급 기술자'로 일당 16만2862원, 석사 학위를 따고 2년 이상 경력을 쌓으면 '중급 기술자'로 일당 20만8943원이 매겨진다. 소프트웨어를 만든 사람의 능력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소프트웨어의 가치가 아니라 일당의 개념으로 구매가를 결정해왔던 것.
이 회장은 "국내 기업은 SW를 하도급으로 여기는 데다가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SW 개발업체에 SW 가치가 아닌 노동의 대가를 지불한다"며 "이 때문에 국내 SW업체들은 일하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며 주문자 입맛에 맞는 제품을 생산하느라 세계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 같은 천재도 월 1200만원 정도의 기술자밖에 안 된다"며 "도저히 좋은 소프트웨어가 나올 수가 없는 구조"라고 밝혔다.
가치구매 방식을 도입함에 따라, 앞으로는 한 명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라도 수십명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보다 가치가 있다면 더 높은 가격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KT는 가치구매를 시행하기 위해 전담 평가조직을 신설하고 SW 가치평가 기준을 정립할 예정이다. 내년 1분기 안에 가치구매 산정기준을 공개하고, 이를 토대로 하는 SW구매를 내년 300억∼500억원 규모로 시작해 2015년까지 연간 3천억원 규모로 확대할 계획이다.
◇ SW저작권 개발사에
전략 2행은 SW개발업체가 SW를 장기적으로 개발하고 유지·보수까지 담당하며, 사업을 예측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 역시 SW업체가 하도급 업체에서 벗어나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고, 발주기업 1곳을 위한 상품이 아니라 오라클이나 마이크로소프트(MS)의 SW처럼 세계적인 상품을 만들 수 있는 기업으로 성장하도록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방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소프트웨어의 소유권은 개발을 의뢰한 기업이 가지게 되어 있어서, 개발사는 같은 제품을 다른 회사에는 판매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 회장은 "용역계약을 하면 SW에 대한 소유권과 지적재산권이 발주사에 돌아가지만, KT는 개발업체에 이 권한을 줄 것"이라며 이를 통해 SW업체들이 1회성이 아닌 장기적인 개발을 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납품받은 소프트웨어의 소유권을 개발사에 주고 회사는 사용권만 갖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소프트웨어 개발회사는 KT에 납품했던 소프트웨어를 다른 회사의 수요에 맞게 일부 변형해 판매할 수도 있다.
이석채 회장은 "비싼 돈 들여서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도 한번 납품하고 나면 끝"이라며 "비슷한 제품을 수십개 업체에서 각자 개발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고 지적했다.
KT는 또 개발업체에 SW에 대한 유지·보수 권한을 주면 SW가 안정적으로 향상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저가 경쟁입찰로 유지보수료를 낮춰 온 악습을 버리고 적정한 대가를 적용해 유지보수 품질을 높일 방침이다.
KT는 협력사에게 예측 가능한 정보를 주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수요예보제'를 HW에서 SW로 확대하고, 클라우드 기반의 SW 개발환경을 제공하는 클라우드 인큐베이션센터를 설립해 KT가 가진 지적재산권을 공동 활용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또 소프트웨어의 유지보수 비용도 올려주기로 했다. 소프트웨어는 회사의 필요에 따라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고쳐주는 등 전자제품처럼 꾸준한 애프터서비스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유지보수비용에 있어서 국내 기업들이 국내 소프트웨어 회사와 해외 소프트웨어 회사에 제공하는 액수에 차이가 있다. .
국산 소프트웨어 업체는 유지보수 비용으로 매년 초기 발주액의 7~8% 정도를 받지만, 외국 회사인 오라클·SAP 등이 평균 22%를 받고 있다. 국내 소프트웨어 업체는 해외 업체보다 3분의 1에 불과한 비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유지보수비가 낮게 책정되다 보니 해외 업체에서 제공하는 유지보수 서비스보다 품질이 낮아질 수 밖에 없다.
이석채 회장은 "국산 소프트웨어도 적정한 대가를 보장받을 필요가 있다"며 "유지보수비를 글로벌 수준까지 끌어올려 개발사의 생존 환경을 보장하겠다"고 말했다.
◇ 오픈마켓 구축
전략 3행은 SW를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는 오픈마켓을 구축해 SW업체들의 세계 진출을 지원하는 것이다.
KT는 현재 기업 솔루션 오픈 마켓을 구축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각종 솔루션을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을 형성할 계획이다.
이 밖에도 KT는 아시아 애플리케이션(앱) 마켓인 오아시스(OASIS), 글로벌 앱 마켓(WAC) 등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SW개발업체들이 KT의 글로벌 파트너와 접촉할 수 있도록 지원해 해외사업에 동반 진출하는 기회도 제공할 예정이다.
이 회장은 "가치 있는 SW업체가 있다면, 이를 인정해 그 업체를 인수합병(M&A)할 수도 있다"며 "이 같은 노력으로 우리나라에 실리콘밸리같은 SW 생태계가 이뤄지면 많은 인재들이 SW업계로 몰려들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