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일보 이형석 기자] 경기 침체 장기화로 자금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과 서민을 위해 편리하게 만들어놓은 정책자금의 대출 제도가 범죄에 악용되고 있는 가운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사를 상대로 수출 실적이나 전세계약서를 위조해 거액을 대출받아 챙기는 금융범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은행들이 대출사기꾼들 배만 불려주고 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가 경제정책의 목표에 맞춰 자금을 공급하는 정책자금을 노린 사기대출은 은행의 허술한 대출심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기대출이 잘 터지는 지점은 브로커와 사기꾼 사이에 소문이 났다는 이야기마저 돌고 있는 상황이다.
대출금을 떼여도 은행이 좀처럼 손실을 보지 않고 국민 부담으로 돌아가도록 설계된 대출구조 역시 범행의 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심사를 대폭 강화하고 보증 비율을 낮추면 사기를 줄일 수 있지만 정책자금의 공급 효과가 반감될 수 있어 정부로선 난처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은행이 실질위험을 분담하고 대출 심사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6일 금융권에 따르면, 주택금융공사, 무역보험공사, 시중 은행 등이 수출 및 주택 자금 대출 사기를 당한 액수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최대 1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수출 실적이나 전세계약서를 위조해 대출받았다가 범행이 들통나 확정판결을 받은 사례만 이 기간 20여건에 300억~400억원 수준이다.
부실 대출로 경찰이나 검찰 등 수사 단계에 있거나 사기로 의심되는 대출도 500억~600억원이 되는 것으로 금융권은 보고 있다.
범죄로 확정되거나 사기로 의심되는 대출을 합치면 1000억원에 달하는 셈이다.
불황이 악화하면서 사기 대출이 극성을 부려 최근 두 달 새 검찰과 경찰에서 140억원대 범죄가 적발됐다.
서울경찰청은 유령업체의 수출 실적을 위조해 무역보험공사의 `수출신용보증제도'로 무역금융 대출 102억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로 일당 10명을 구속했다.
서울중앙지검은 노숙자에게 돈을 주고 명의를 빌려 유령회사를 만들고서 무역보험공사에서 10억여원을 빌려 가로챈 일당도 검거됐다.
유령회사에서 가짜 재직증명서 만들고 전세계약서를 꾸며 5개 은행 등에서 25억5500만원을 대출받아 가로챈 혐의로 일당 3명이 경찰에 적발됐다.
이 같은 범죄는 정부가 수출업자와 서민 대출을 적극 장려한데다 해당 금융 공기업과 시중 은행이 대출 심사를 허술하게 한 탓에 발생했다.
정책자금은 주로 정부가 출연한 기금 등이 보증을 붙여 은행권을 통해 공급하는데, 정부의 보증이 붙는 만큼 대출금리가 일반 대출보다 훨씬 낮다.
중소·벤처기업의 대출을 보증하는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이 대표적이며, 주택자금을 보증하는 국민주택기금과 무역보험공사의 수탁보증도 기능이 비슷하다.
문제는 이런 정책자금이 자칫 `눈먼 돈'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수출신용보증은 사기 등 부실 사고가 나면 무역보험공사가 전체 액수의 80%, 주택기금은 주택금융공사가 90% 책임을 지기 때문에 지급 보증과 심사 업무를 수탁받아 대출해주는 은행은 심사를 소홀히 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대출심사를 창구 인력이 많은 은행이 거의 도맡는데 은행으로선 손실이 나도 보증기관이 메울 테니 심사를 까다롭게 할 이유가 별로 없다.
2000년대 들어 보증기관과 은행이 위험을 나눠 지는 `부분 보증'이 도입됐지만, 실제로 은행이 위험을 떠안지는 않았다. `꺾기(구속성 예금)'와 추가 담보 덕이다.
보증비율을 80%로 낮추면 은행은 나머지 20% 대출금만큼의 예·적금 가입이나 추가 담보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위험을 상쇄하는 것이다.
조금만 철저하게 심사하면 막을 수 있는 사기대출이 버젓이 저질러지는 데는 은행의 이러한 도덕적 해이가 한몫했다고 보증기관 종사자들은 입을 모았다.
금융사들은 대응책을 모색하고 있으나 미봉책에 그쳤다는 지적을 받는다.
무역보험공사는 지난해 말 수출신용보증제도를 뜯어고쳤다. 은행에 지급보증 심사를 위탁하는 수탁보증제도를 폐지하고 자사 직원이 직접 지급보증을 심사한다.
무역보험공사 관계자는 "고객이 주거래은행에서 지급보증 심사까지 받으면 좋을 거라는 생각에서 제도를 만들었는데 악용 사례가 많아 폐지했다"면서 "은행의 도덕적 해이가 고쳐져야 개선점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주택금융공사는 지난 7월 사기 대출 예방 프로그램을 강화했다.
1주택에 1명만 전세자금을 보증할 수 있도록 전산시스템 등을 보완했다. 1년이 안 된 재직자는 건강보험 가입 여부도 확인한다.
김동환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수탁 보증은 은행으로서는 20%만 책임지면 되므로 신용 심사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서 "은행의 책임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그러나 대출 브로커 등이 끼어서 교묘하게 대출사기가 이뤄지기 때문에 은행과 정부도 골머리를 ㅤㅇㅏㅎ고 있다.
사기대출은 정부의 자금공급 정책, 보증기관과 은행의 심사 절차 등을 훤히 꿰지 않고선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지능형 범죄여서 대출 브로커와 서류 위조 전문가 등을 끼고 조직적·대규모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브로커는 사기대출을 받기 쉬운 은행 지점의 `명단'도 만든 것 같다는 게 관련 업계의 증언이다. 특정 지점에서 사기대출이 빈발하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브로커가 사기꾼에게 해당 지점을 알려주면 집중적으로 공략되는 것 같다"고 전했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도 "연례행사처럼 이런 방식의 사기대출이 터지곤 한다"고 말했다.
사기대출의 피해는 국민 몫이다. 보증기관은 은행에 대위변제(피해액을 대신 갚음)를 하지만, 범인을 잡아 돈을 회수하지 못하면 구상권을 행사할 수 없다.
신·기보는 외환위기 이후 대위변제 탓에 적자가 쌓여 정부가 해마다 국민 세금으로 약 1조원씩 이들 보증기관에 넣었다.
은행이 실질적으로 위험을 분담하도록 보증 비율을 더 낮추거나 대출 심사를 강화하면 어느 정도 사기대출을 막을 수 있다.
실제로 국민주택기금 전세자금은 대출자의 신용등급이 높으면 자금 용도 확인을 생략했는데, 최근 경찰이 적발한 사기 사건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김동환 연구위원은 "독일이나 일본 등은 보증비율을 50% 정도로 낮게 유지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은행의 부담을 늘리고 심사를 강화하면 되레 대출이 위축돼 정책 효과를 반감시킬 우려가 있어 정부로선 선뜻 이런 방안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