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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는 유럽 위기와 같은 대규모 사태로 발전할 가능성은 아직 희박하지만, 그간 남유럽 시장이 과대평가된 측면이 있어 당분간 변동성이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 포르투갈 최대 은행, '동양사태' 유사 위기
10일(현지시간) 포르투갈 최대 은행인 방코 에스피리토 산토(BES) 주식이 17.2% 폭락한 끝에 거래정지를 당한 것을 계기로 이번 악재가 표면화됐다.
이 은행의 모기업인 재벌그룹 에스피리토 산토 인터내셔널(ESI)이 자사의 단기 회사채에 대한 이자 상환을 최근 연기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BES로 위기가 확산할 것이라는 우려가 포르투갈 증시를 강타한 것이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 증시 PSI 20 지수가 이날 4.2% 폭락한 것을 필두로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 증시가 일제히 1% 이상 떨어졌다.
호텔·병원 등 여러 분야 자회사를 운영하는 ESI 그룹과 BES의 문제는 지난해 말부터 시장에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해 12월 ESI 그룹의 비정상적 경영에 대해 보도한 것을 계기로 포르투갈 중앙은행은 ESI 그룹과 BES에 대해 감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ESI 그룹이 13억 유로(약 1조8천억원) 규모의 회계 부정을 저질렀고 재정적으로 심각한 상태라고 포르투갈 중앙은행은 지난 5월 발표했다.
자금 사정이 어려워진 ESI 그룹은 BES를 통한 그룹 회사채 판매에 자금 조달을 크게 의존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마치 한국의 동양그룹 사태와 흡사한 꼴이다.
WSJ에 따르면 지난 1일 현재 BES의 고객이 보유한 ESI 그룹 회사채 규모는 개인투자자가 6억5천만 유로, 기관투자자가 19억 유로에 이른다.
◇ 해당 은행 구제금융 가능성
관건은 ESI 그룹의 위기가 BES를 통해 은행권 차원의 위기로 확산되느냐다.
포르투갈 중앙은행과 정부는 ESI 그룹의 위기가 BES로 전이될 위험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포르투갈 중앙은행 대변인은 BES가 최근 신주발행을 통해 자본금 10억4천500만 유로를 증자한 점을 들어 "BES의 지급능력은 탄탄하며 최근 자본 확충으로 상당히 강화됐다"고 밝혔다.
BES가 ESI 그룹 회사채를 판매했지만 이를 상환할 직접 책임은 없기 때문에 ESI 그룹의 위기가 곧 BES의 위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BES가 ESI 그룹 산하의 에스피리토 산토 금융그룹(ESFG)에 대출한 자금이 8억2천300만 유로에 이른다고 WSJ는 지적했다.
ESI 그룹의 위기가 BES로 번질 위험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BES 사정을 잘 아는 한 은행 소식통은 BES 자본이 2억∼3억 유로 가량 부족하며 정부 구제금융이 가장 가능성 있는 해결책이라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밝혔다.
포르투갈 정부는 지난 2011년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구제금융에서 은행 자본확충용으로 받은 자금 중 64억 유로를 아직 갖고 있어 BES의 위기 시 정부 구제금융 재원은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 '제2 유로존 위기 없다'…일시적 조정 가능성도
이에 따라 시장에서는 이번 악재가 ESI 그룹과 BES라는 개별 재벌, 은행의 위기일 뿐 시스템 차원의 위기로 퍼질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전망이 많다.
WSJ는 다수 펀드매니저·트레이더 등이 유로존 위기 재연이나 전 세계적 패닉의 조짐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FT도 지금까지 나타난 징후로는 가까운 시일 내에 새로운 유로존 위기는 없다고 관측했다.
실제로 이날 포르투갈 10년물 국채 금리는 0.21%(21bp) 상승한 연 3.956%였으나 이는 지난 5월 중순 수준이어서 위기감이 아직은 그리 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유럽 국가들의 10년물 국채 금리도 스페인이 2.818%로 0.069%, 이탈리아가 2.942%로 0.064% 오르는 데 그쳤다.
뉴욕증시의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도 포르투갈 악재에 장중 한때 약 150포인트 떨어졌다가 막판에 낙폭을 줄여 70.54포인트(0.42%) 하락으로 마무리했다.
이런 막판 반등은 이번 사태가 확산되지 않으리라는 관측이 퍼졌기 때문이라고 WSJ는 전했다.
이은택 SK증권 연구원은 "남유럽 국채 금리가 뛰어오르기는 했지만 패닉 상황은 나타나지 않았다"며 "문제가 남유럽 전체로 퍼져 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최광혁 이트레이드증권 연구원도 "기초여건(펀더멘털) 측면에서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아직은 포르투갈 지역에 국한된 문제로서 정부가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간 유럽 금융시장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는 징후가 있어 이번 포르투갈 악재로 당분간 유럽 시장의 변동성이 커질 가능성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이탈리아 등의 국채 금리가 같은 날 미국 10년물 금리 2.532%와 큰 차이가 없는 점을 들어 이들 국가의 국채가 과대평가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남유럽 위기국들이 위기를 빠져나왔다지만 여전히 회복이 더딘 마당에 유럽중앙은행(ECB) 등의 '유동성 파티'로 인해 시장에 낙관론이 과도했던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럽 시장은 앞으로 일시적 조정을 거칠 수도 있다고 FT는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