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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김대중… 범상치 않았던 역대 대통령들의 3년차 맞이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3년차에 접어들었다. 현재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등으로 잇달은 악재에 시달리고 국정 지지율도 20%대까지 추락하는 등 위기를 맞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임기는 5년이다. 역대 대통령들 역시 임기의 초반에 해당하는 2년은 악재로, 혹은 민심을 얻을 기회로 다가온 큰 사건을 경험했었다.

 

초대~3대 대통령 이승만
초대~3대 대통령 이승만

이승만에게 집권 3년차는 한국 전쟁의 시작이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대전으로 피신해 사흘을 머문 뒤 익산, 목포, 부산, 대구 등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전황을 몰랐던 국민들은 북한군이 서울에 침입한 뒤에야 피난을 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이 북한의 남하를 차단하기위해 예고없이 한강철교를 폭파하자 많은 시민들이 서울에서 빠져나가지 못해 북한에 강제동원되고 목숨을 잃었다.

전세가 악화되자 이승만은 7월 14일에 맥아더 유엔 총사령관에게 한국군 작전 지휘권을 위임했다. 한편 7월 25일엔 미군에 의해 충북 노근리의 민간인 400여명이 학살당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5~9대 대통령 박정희
5~9대 대통령 박정희

박정희는 5대에 걸쳐 대통령직을 연임한 만큼 전/후기로 나누어 서술하겠다. 초기의 3년차인 1965년 박정희는 김종필을 앞세워 일본과의 한일협정을 추진한다. 일제의 36간의 수탈로 입은 피해에 대한 배상과 원조를 '배상금'이 아닌 '독립 축하금'의 명목으로 돌려받았다. 박정희는 이를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지기 위한 자금을 확보했고, 이 금액에서 약 8천만 달러를 포항제철소 건립에 투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학생들과 언론은 "개인의 수탈에 대한 배상금을 국가가 독식한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학생시우가 수그러들지 않자 박정희는 65년 8월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학생시위가 심해지자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해 학생시위를 진압했다. 박정희가 체결한 한일협정은 아직도 일본와 식민지배 당시의 배상문제로 갈등 빚게 하는 요인이다.

후기(7~9대)의 3년차에 접어든 1973년엔 김대중 납치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김대중은 1973년 8월 일본 도쿄의 그랜드팰리스호텔에서 실종된 뒤 129시간 만에 서울의 자택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한일간 외교문제로 확대되었다. 일본측이 한국의 공권력이 일본의 주권을 침해했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이 사건에 대한 정부 개입설을 부정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이 범인의 지문을 채취해 증거를 포착하고 관련자들의 출두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했으며, 이후 1987년에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이후락은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이 교민 사이에서 망명정부를 세울 가능성에 납치를 한 것이란 인터뷰를 남겼다.

 

11~12대 대통령 전두환
11~12대 대통령 전두환


전두환은 집권 3년차인 1983년에 88년 올림칙 유치에 성공했다. 그의 올림픽 유치 노력은 일본의 거물 우익 정치인 세지마 류조의 조언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쿠테타 정권인 5공화국이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시도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경쟁상대였던 나고야는 이미 77년부터 올림픽 유치 준비를 하고있었기에 서울이이 개최지로 당선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결국 성공적으로 개최를 하면서 한국이 국제적인 위성을 얻을 수 있었고 외교 노선의 다변화를 꾀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의 냉전체제에 속해있지 않던 제 3세계 국가들이 한국을 압도적으로 지지했고, 이에 전두환은 선진국과 강대국 못지 않게 아프리카 등 3세계 국가이 외교에 상당한 공을 들이기도 했다. 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한국 대통령이 현지 국가에 공식 방문한 사례는 전두환이 최초였다.

 

13대 대통령 노태우
13대 대통령 노태우

세계를 양분화했던 냉전체제는 노태우 대통령의 직권 3년차인 1990년을 기준으로 급격하게 변화한다. 독일 통일을 시작으로 공산진영 국가들이 신정부를 출범시키며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대한민국 역시 소련과 수교를 맺었으며,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러시아와 재차 수교를 맺었다. 대북관계의 분위기도 온화해졌다. 노태의 정부의 대북관인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선 한국과 북한이 두 개의 주권국가 연합을 과도기 단계로 인정했으며, 북한도 남한의 교류제의를 수락했다.

9월엔 총리를 대표로 하는 남북고위급 회답이 열렸고 이 회의가 열리는 동안 범민족통일음악회가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렸다. 남북 축구팀의 통일축구대회도 두 도시에서 연달아 개최되었으며, 1991년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남북이 단일팀을 결성해 출전하기도 했다.

 

14대 대통령 김영삼
14대 대통령 김영삼

김영삼은 집권 3년차에 신군부의 숙청에 나섰다. 김영삼의 측근이던 서석재 총무처 장관은 전임 대통령 중 4천억 이상의 비자금과 가명계좌를 보유한 인물이있다는 의혹을 제기했으며, 이어 국회의원인 박계동에 의해 4천억 비자금 설이 폭로되었다.

검찰은 최초에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신군부 인사들을 불기소 처분했으나 김영삼은 대통령 명령으로 5.18사건의 공소시효를 정지하는 특별법을 제정해 재차 수사를 촉구했다. 헌법재판소 역시 "성공한 쿠테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려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검찰수사가 이루어졌다. 결국 두명의 전임 대통령은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15대 대통령 김대중
15대 대통령 김대중

김대중은 집권 3년차인 2000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에서 군부의 억압에 저항하지 않고 저항운동을 하고 권력의 탄압, 협박, 납치 등의 압박에 굴하지 않아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데 기여한것이 업적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남북관계에 대하 햇빛정책 등 평화를 지향하는 대북포용정책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과 게성공단을 설립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낸 것도 노벨 평화상의 선정이유였다.

2014년 까지 대한민국의 국민 중 노벨상을 수상한 인물은 김대중이 유일하다.

 

17대 대통령 이명박
17대 대통령 이명박

 

이명박은 집권 3년차엔 북한의 천암함 피격 도발을 경험했다. 2010년 3얼 26일 대한민국 백량도에서 훈련중이던 초계함 천안함은 북한 해군의 어뢰에 의해 침몰했다. 함 내 인원 중 58명은 현장구조되었으나 46명은 사망했다.

이에 정부는 천안함 침몰 원인을 규명할 민간?군인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북한의 어회공격이 침몰의 원인이란 결과를 발표했으며, 이어 미국, EU,일본, 인도 등의 지원에 힘입어 안보리안건에 천안함 침몰에 대한 내용을 제출했다. 이에 안보리는 천안함 공격을 규탄하는 내용의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이명박은 동년 5월 24일 북한의 천안함 침몰사태를 북한의 군사적 도발로 간주하고 북한의 남한 해역 해상교통이용로 금지와 남북교류 중단을 선언했다. 이에 북한은 남한의 천안함 조사결과 발표를 '날조극'이라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