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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 '철학적 병' 진단한 분석철학의 거두, 김영진 인하대 명예교수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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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계에 영미 분석철학을 도입하고 사회적 가치관의 혼돈을 치료하는 '임상철학'을 제창한 김영진 인하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가 향년 86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분석철학의 방법론을 현실 사회 문제에 투영하여 한국인의 논리적 오류와 윤리적 질환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지성계의 거목이다.

김영진 인하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7일 오전 3시 26분께 일산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1940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79년 미국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정통 분석철학자다. 귀국 후 계명대학교와 인하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한국 철학의 지평을 관념론에서 분석철학으로 확장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고인의 학문적 행보는 1980년대 초반 한국 철학계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며 시작되었다. 1980년 계명대학교 철학과 부교수로 부임한 그는 당시 학계를 지배하던 독일식 관념 철학의 한계를 지적하며 영미식 분석철학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러한 학문적 도전은 대학 내 '목요철학세미나'가 탄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 철학의 방법론적 혁신을 이끌었다.

계명대학교 재직 당시 동료였던 백승균 명예교수는 고인의 영향력에 대해 "미국에서 철학을 전공한 김영진 교수가 부임하면서 철학과에 학문적 파장을 몰고 왔다"고 회고했다. 백 교수는 이어 "그는 분석철학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철학을 들고서 독일 관념론이 주류였던 철학과를 뒤흔들기 시작했다"고 증언하며 고인의 선구자적 면모를 높이 평가했다.

분석철학의 핵심인 과학철학 방법론에 천착하던 고인의 연구는 이후 '임상철학'이라는 독창적인 영역으로 진화했다. 2004년 정년 퇴직을 앞두고 출간한 저서 '철학적 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고인의 학문적 결실이 집약된 저술로 평가받는다. 그는 육체적 질병과 정신적 질환 외에 인간의 사고 체계에 기생하는 '철학적 병'이 존재함을 역설하며 철학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다.

고인이 정의한 철학적 병은 한 가지 견해만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광신주의와 다양한 논리적 오류를 포함한다. 사실과 가치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가치관의 혼돈 역시 현대인이 앓고 있는 중증의 철학적 질환으로 규정되었다. 그는 이러한 병증을 진단하고 적절한 처방을 내리는 철학의 새로운 분야를 '임상철학'이라 명명하며 철학의 실천적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철학은 치료"라고 주장했던 분석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고인은 비트겐슈타인의 방법론을 박제된 이론이 아닌 현실적인 삶의 문제에 적용하여 철학이 실질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철학자가 상아탑에 갇히지 않고 사회적 질환을 치유하는 진단가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현대 한국 사회에 대한 고인의 비판은 매우 구체적이고 신랄했다. 그는 2005년 인터뷰를 통해 "수많은 집회 현장과 TV 토론을 지켜본 결과 한국인들은 중증의 철학적 질환을 앓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한국인이 도덕과 예절을 구분하지 못하는 '윤리적 질환'에 빠져 있음을 지적하며 한국 사회의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경계했다.

고인은 "부모나 스승의 잘못을 따지지 못하는 것은 예절일 뿐이지 도덕이 아니다"라고 단언하며 도덕의 본질을 재정의했다. 그가 강조한 도덕은 옳고 그른 것을 명확히 따질 수 있는 정직과 공정성, 그리고 형평성에 근거한 이성적 판단이었다. 한국 사회가 예절이라는 명목하에 부조리를 묵인하는 현상을 철학적 관점에서 비판한 것이다.

논리적 훈련의 부재에 대해서도 고인은 엄중한 경고를 남겼다. 그는 한국의 지식인들조차 일반과 보편, 모순과 반대, 애매와 모호라는 기본 개념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질타했다. 낙태 허용 여부를 둘러싼 논쟁에서 '모순'과 '반대'를 혼동하는 사례를 들어 한국 사회의 논리적 미숙함을 증명했다.

고인의 분석에 따르면 영미권 언론은 논리적 개념을 엄격히 구분하여 보도하는 반면 한국 언론은 이를 무시하는 경향이 짙다. 이러한 논리적 무지는 결국 사회적 합의를 방해하고 소모적인 갈등만을 양산한다는 것이 고인의 판단이었다. 그는 언론과 지식인 계층이 먼저 철학적 엄밀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촉구했다.

일각에서는 고인의 임상철학적 접근이 사회적 갈등을 지나치게 논리적 범주로만 환원하려 한다는 비판적 시각을 제기하기도 한다. 인간의 감정과 역사적 맥락이 얽힌 복잡한 사회 현상을 질병으로 규정하는 것이 다양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고인의 주장은 논리적 명료함이 결여된 토론은 결코 생산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는 시장 질서와 법치의 기본 원칙을 환기한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부인 윤선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와 아들 민규, 한규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으며 발인은 오는 9일 오전 6시에 엄수된다. 장지는 크리스찬메모리얼파크로 정해졌다. 고인이 남긴 임상철학의 유산은 합리적 이성과 논리가 실종된 현대 한국 사회에 여전히 유효한 처방전으로 남아 있다.

향후 한국 철학계는 고인이 제창한 임상철학의 방법론을 계승하여 사회적 갈등을 중재하는 실천적 연구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분석철학이 단순한 언어 분석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도덕적 토대를 재건하는 도구로 쓰여야 한다는 고인의 유지는 후학들에게 무거운 과제로 남았다. 고인의 별세는 한국 지성계에 논리적 엄밀성과 도덕적 정직성을 다시금 성찰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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