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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총수 사면은 ‘꿀꺽’… 약속은 ‘나 몰라라’

전문가들 사이에서 경제 활성화를 위해 비리 기업인을 대거 사면하는 일은 오히려 기업발전에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공론이다.
단기적으로 기업 주가가 떨어질 수 있지만, 경영권 불법승계, 분식회계, 비자금 조성 등 악질 경제범죄를 근절하면 장기적으로 기업 발전에 유리하다는 분석결과가 나와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본지 취재에 응한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이번 특사에 포함될 것으로 보이는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계열사 주식을 저가에 사들여 회사에 손해를 끼친 배임혐의로 형 집행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라며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 한보사태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지만 다시 강릉 영동대 교비 72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돼있는 점을 감안하면 경제 살리기라는 명분은 허위”라고 일침을 놓았다.

이처럼 특정 재벌 총수에게 사면이 반복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자 사면 이후 후속조치는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현대기아차의 정 회장이 특별사면을 받으며 “사재 출연으로 1조원의 사회공헌기금을 조성해 환원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X파일 사건과 에버랜드 전환사채(CB)증여 문제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자 오너 일가의 사재 8천억원을 조건 없이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면 이후 이들의 행보가 단순한 요식행위에 그치며 ‘면죄부’를 받고 최소한의 도의적 책임조차 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와 관련 김 교수는 “사법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법치국가가 어떻게 확립되겠느냐”고 반문하며 “면죄부를 받은 재벌 총수들이 최소한의 도의적인 책임을 보여주는 것이 우선이다”고 진단했다.

◆ 현대차그룹 ‘해비치 재단’ 무슨 일하나, 환원은 특정 재단에 집중

이명박 정부 들어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뒤 채 100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사면을 받은 재벌 총수는 12명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가운데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재벌 총수들도 대거 포함돼 있다.

이와 관련 당시 사건을 진행하던 내부 관계자는 “주목할 점은 이들 중 대다수가 재산환원이나 사회봉사와 같은 특이한 형태로 사면을 받았다는 것”이라며 “하지만 정작 재산환원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는 미지수”라고 전했다.

현대기아차의 정 회장은 지난해 해비치재단에 600억원대 주식을 기부한 것 외에 앞서 두 번에 걸쳐 900억원, 현재까지 총 1천500억원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초 비자금 조성 혐의로 검찰에 소환됐을 때 사재 출연으로 1조원의 사회공헌기금을 조성해 환원하겠다는 목표와는 한참 동떨어져 액수와 시기가 고무줄이라는 따가운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다.

이와 관련 김 교수는 “글로비스 사태로 주식 2천250만주를 포함해 1조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던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라며 “대법원의 파기환송으로 사재출연에 대한 법적 책임은 없지만 대기업 총수로서 최소한의 도덕적 책임은 지켜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전문가들은 이들의 재산환원이 ‘재단’을 통해 이뤄지고 있는 것도 의혹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환원 활동이 직접 기부보다 특정 재단에 집중됨으로써 출연한 사재를 편법적으로 쌓아두고 있는 것 아니냐는 날선 눈초리가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기아차의 정 회장은 1조원 사회환원 약속을 위해 재판이 끝나면서 ‘해비치사회공헌재단’을 출범시켰지만 특정 재단이 금고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른바 글로비스사태로 불리는 현대차의 비자금 사건은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의 후계구도 강화를 위한 계열사의 불법 활용이었고 환원 결정이 비자금사건을 무마하기 위한 목적임을 감안하면 해비치재단이 종국적으로 지배구조 강화에 활용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높아가고 있다.

이와 관련 현대기아차는 재산환원 약속은 법적 구속력이 없어 지극히 개인적인 약속이기 때문에 개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시민단체 사이에서는 사회적으로 재판 중 사재출연을 약속하고 면죄부를 받은 상황에서 당초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모습은 대기업 총수로서 지탄받아 마땅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약속한 액수와 시기가 고무줄처럼 제각각이고 재단활동을 둘러싼 갖은 의혹이 넘쳐나는 점을 감안하면 정 회장이 재산환원 약속을 어떤 방식으로 지켜나가느냐에 따라 정의선 부회장의 경영권 계승에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조심스레 점쳐지고 있다.

◆ 국내 최고기업, 삼성전자의 이건희 회장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또한 오너 일가의 사재 8천억원을 조건 없이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지만 대부분은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을 통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 익명을 요구한 한 모 재단관계자는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은 서울시 교육청이 운영하기 때문에 삼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실제로 재단으로 유입되는 자금은 100%로 면세 대상”이라며 “특정 재단에 환원활동이 집중되고 있는 점은 재단을 통해 쌈짓돈을 굳히려는 의도로 해석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전했다.

특히 차명계좌가 공개되며 곤혹을 치른바 있는 이 회장이 차명계좌에 남아 있는 4조5천억원을 유익한 일에 쓸 방침이라고 밝혔지만 아직까지 그 유익한 일이 무엇인지 시기는 언제쯤이 될 것인지 정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유익한’ 일이 합법 증여 등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는 데 쓰이는 것은 아니냐는 냉소 섞인 반응도 나오고 있다.

김 교수는 이와 관련 “표현 자체가 애매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 쓴다는 것인지 상속·증여를 합법적으로 하는 데 쓴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라며 “자기 돈을 자기가 쓰겠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법적 혹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사재출연 혹은 위기 무마용으로 번번이 법치를 유린하고 있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 ‘금권’의 면죄부 해답은 없나

한편 이번 특사에 포함될 것으로 보이는 동부그룹의 김준기 회장도 재산환원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부그룹은 동부하이텍을 살리기 위해 김 회장이 채권단과 협의를 통해 연말까지 사재를 통해 9천억원을 마련하기로 했지만 이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지는 미지수다.

최근 김 회장이 1천500억원의 사재를 출연해 동부인베스트먼트를 설립했지만 이 또한 특별사면을 위한 형식적 행위일 뿐, 1인 주주회사로서 출연한 사재가 종국적으로 김 회장에게 귀속될 것이라는 따가운 시각이 주를 이루고 있다.

1초7천억원의 막대한 분식회계 사건을 저지르며 사재출연을 약속했던 SK그룹의 최태원 회장 또한 사면 이후 재산환원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4년이 지나서야 본인 소유의 지분을 내놓는 등 액수와 시기가 ‘고무줄’인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면죄부를 받은 재벌총수 중 하나인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은 ‘두산가 형제의 난’ 이후 사면을 통해 경영 일선에 복귀했으나 공식적으로 사회 환원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 바 있어 재벌 총수에 대한 이미지를 악화시켰다.

박 회장은 공식석상에서 “경영권 세습은 세금을 내면 끝나는 문제지 사재를 털어 사회에 환원하라는 요구는 헛소리”라며 “경영직을 형제 사이에서 쭉 승계하고 다음 장자로 넘어가는 시스템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지분 쪼개기 등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특사를 통해 경영에 복귀한 재벌 총수에게서 이런 발언이 나온 것은 면죄부를 받은 재벌 총수들의 도덕적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입을 모았다.

이처럼 특별사면이라는 면죄부를 통해 금권 앞에 법치주의가 유린당하자 일각에서는 대통령의 사면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사면법이 위임한 대통령 사면권이 자의적으로 남용되자 사회 전반적으로 사법 불신이 심화되고 있다는 일각의 분석 때문이다.
또 일부 재벌 총수들이 약속한 봉사·환원 활동에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재산환원을 둘러싼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인 현대기아차의 경우 “시간이 나는 대로 앞으로 꾸준히 사회에 환원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결국 정 회장에게는 계획만 있을 뿐이지 그 계획을 실천할지는 요원하다는 것이 각계 관계자들의 공론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김 교수는 “재벌 총수의 봐주기 식 사면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에 담긴 국민들의 사법불신을 더 심화시킬 뿐”이라고 선을 그으며 “그들만의 권력집단 안에서 사법부의 형벌권이 유린당하고 법치주의의 근간이 흔들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