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일보 이호영 기자] 유럽 재정위기 여파로 인해 힌국 경제에 구조조정 칼바람이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가 뚜렷한 해법 없이 장기화되면서 글로벌 경기가 침체에 빠지고 국내 경제도 불황의 조짐을 보이면서 은행, 증권, 카드, 건설, 해운 등 업종을 불문하고 기업들이 인력 감축, 조직 통폐합, 자산 유동화를 통한 현금 확보 등의 비상 경영에 들어간 것.
그동안 버텨온 기업들도 최근 계열사나 보유 자산을 매각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금 확보에 나섰다.
상대적으로 부실한 중소기업들은 하반기 수출 부진이 심해지면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90년대 말 외환위기 때 악몽이 되살아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매물로 나오는 기업들이 쏟아지면서 M&A(인수합병) 시장도 점점 커지고 있다. 대기업들은 호황기를 노리며 M&A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 구조조정 칼바람 한국 경제 전방위 확산
12일 금융기관과 상장사들에 따르면, 비상경영은 업종과 규모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다.
조선, 해운, 철강, 석유화학, 휴대전화 등 그동안 한국 경제를 떠받쳐온 주력 업종은 7월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20∼60% 감소할 정도로 부진을 면치 못하면서 생존 투쟁에 들어갔다.
국내 부동산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건설업계는 수백명 수준의 인원을 감축한 곳이 있는가 하면 자회사 지분이나 선박, 건물 등 자산을 매각해 유동성을 확보하는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특히 취약 업종인 건설과 해운업체들은 이미 불황으로 수많은 업체가 부도를 맞았고 지금도 고통스러운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고 있다.
전국건설기업노동조합연합에 따르면, 작년 한해 100대 건설사 중 25개가 법정관리 또는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여기에는 금호산업, 벽산건설, 풍림산업, 삼부토건, 신동아건설, 동양건설산업 등 중견 건설사들이 포함됐다.
다음 수순으로 인력 감축 등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다. 임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이미 많은 직원이 자발적으로 퇴사했으며, 회사 규모 축소과정에서 희망퇴직 등으로 인원 조정이 이뤄지고 있다.
이에 따라 벽산건설은 2008년 금융위기 이전 직원 수가 600명에 달했으나 지난 6월 말 350명으로 급감했고 풍림산업은 1천명에서 650명, 우림건설은 400명에서 140명, 우방은 340명에서 70명으로 직원수가 쪼그라들었다.
이에 따라 건설사들은 생존을 위해 자회사를 매각하는 등 유동성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동부건설은 최근 자회사인 동부익스프레스 지분 49.9%를 매각해 재무구조를 개선하기로 했다. 무보증 신주인수권부사채(BW) 800억원어치를 발행하고, 7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추진한 데 이은 대규모 자금조달이다.
해운업계도 경기둔화로 수익이 급감하자 신규 투자를 중단하고 보유 선박을 매각하며 불황에 대처하고 있다.
국내 해운업체 선박이 싼 가격에 외국으로 매각되자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는 2009년 선박펀드를 조성해 지금까지 선박 33척을 매입하기도 했다.
캠코 관계자는 "하반기에도 상황을 주시해 해운사들이 위기에 처하면 추가로 지원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해운업의 불황은 조선업체에도 타격을 미친다.
HMC투자증권 강동진 연구원은 "대형 해운 업체들이 신규 발주를 하지 않는 등 사업규모를 축소하고 있다"며 "해운업체들이 선박을 늘리지 않으면 수주가 감소해 조선업체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유럽 재정위기로 인한 금융시장 불안과 세계적인 경기 둔화의 여파가 취약 업종으로 분류된 건설과 해운을 넘어 산업 전반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웅진그룹은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KTB투자증권의 사모투자전문회사인 KTB PE 부문과 신설법인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웅진코웨이 지분을 매각했다. 웅진홀딩스는 이번 계약으로 경영권을 지키면서 1조원이 넘는 현금을 확보했다.
STX그룹은 비상장 계열사 지분을 매각해 유동성을 확보할 계획이다. 최근 이민주 에이티넘파트너스 회장이 사모투자펀드(PEF)를 구성해 STX에너지 지분 49% 인수를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STX그룹 관계자는 "인력 구조조정보다 재무구조 개선에 집중하고 있다"며 "계열사인 STX 0SV 매각이 확정됐고, 현재 STX에너지, STX중공업 등 비상장 계열사 일부 지분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자금확보를 위해 자회사를 매각하는 상장사들도 속출하고 있다.
그랜드백화점은 부채상환 및 운영자금 확보를 위해 롯데쇼핑에 인천 지역 토지와 건축물을 매각했다고 6일 공시했다.
하림홀딩스는 자회사 엔에스쇼핑의 기업형 슈퍼마켓 사업부문을 양도하고 토지와 건물도 매각한다고 밝혔다.
한성엘켐텍도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자원개발 자회사를 매각하고 IT분야에 집중한다고 밝혔다.
상대적으로 영세한 중소기업은 더욱 큰 타격을 입고 있어 하반기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달 `업종별로 중소제조업체 100곳을 선정해 실시한 긴급 경영상황조사에서 응답기업 10곳 중 8곳은 `하반기 나아지길 기대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현재 상황에 대한 질문에도 60% 가량이 `나쁘다'고 말했고, '주문 자체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답한 기업이 많았다.
주문량이 급격히 줄어 실질적인 매출감소로 이어졌다는 응답업체가 전체의 49.5%나 됐고, 30% 가량은 불황을 버텨내기 위해 조업시간을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IBK경제연구소 서경란 중기금융팀장은 "중소기업 하반기 수출에 비상등이 커졌고 결국 구조조정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며 "최근 실제로 중소기업에 핵심인력을 포함한 인원 감축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고 전했다.
실물경제에 '혈액'을 공급해야 하는 금융권도 등 비상경영 시스템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은행들은 본격적인 인원감축에 나서고 있지 않지만 각종 업무비용 절감과 지점 통·폐합을 통한 긴축경영에 나섰고 부동산을 매각해 현금을 확보하는 곳도 있다. 특히 과도한 마케팅 비용을 줄이고 업무 추진비, 회식비, 홍보비, 심지어 전기료까지, 줄일 수 있는 것은 다 줄인다는 게 비상경영의 취지다.
또 자연적 감소분을 충원하지 않는 수준의 `소프트한'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우리금융지주는 지난달 중순 `슬림경영'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대규모 투자계획을 최대한 억제하고 불필요한 비용 집행을 억제하는 데 힘을 쏟을 방침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경영혁신 운동을 추진하면서 내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채용을 확대하지 않고 자연감소분을 채우지 않는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비용을 줄이고 있다"면서 "하반기로 갈수록 위기경영 강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 일부 은행에서 명예퇴직 신청을 받은 것을 제외하면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은 본격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분간 자연적 감소분을 충원하지 않는 수준의 소극적 구조조정이 진행될 것이라는 게 금융권의 시각이다.
은행권에서는 SC은행이 작년 12월 명예퇴직 신청을 받아 800명이 퇴직했다. 씨티은행도 작년 11월 명예퇴직 신청을 추진했으나 내부 사정으로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씨티은행 관계자는 "희망퇴직을 시행하면 일시적으로 비용이 많이 발생하는데, 비용조달 문제가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국민은행은 2010년 10월 희망퇴직으로 3천200명이 한꺼번에 나가 아직 구조조정은 감지되지 않고 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아직 은행권의 구조조정은 거론되지 않고 있다"며 "그러나 인력을 확대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식 거래가 급감해 사정이 나쁜 증권사들은 비상 경영에 가장 적극적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한 달에 두 차례 하던 회식을 한차례로 줄이고 이번 달부터는 부서별로 나오는 회식비가 1인당 6만원에서 4만원으로 줄어들 정도"라고 소개했다.
고액 연봉을 받는 리서치센터 애널리스트의 연봉과 인센티브도 일찌감치 삭감됐고 외국에서 열리는 기업설명회(IR) 참가도 더욱 어려워졌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기업 관계자를 만날 때 그동안 법인카드로 비용을 처리했는데 회사에서 지원을 끊은 탓에 자비로 비용츨 지불할 때도 있다"고 전했다.
대신증권이 올해 초부터 벌인 `업앤다운(UP&DOWN) 2012' 운동은 말 그대로 수익성을 높이고 비용은 낮추자는 뜻을 담고 있다.
업계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금융투자협회는 회원사 사정을 고려해 지난달 초부터 업무추진비와 회의비, 홍보비 등의 비용을 20% 줄였다.
또 위험관리 차원에서 직원을 줄이는 추세다.
국내에서 영업 중인 63개 증권사의 전체 직원 수는 작년 말 4만2천682명에서 올해 1분기 말 4만2388명으로 0.7% 감소했다. 1분기 이후에 증권사 인원감축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미래에셋증권은 본부부서를 작년 9월 말 206개에서 올해 3월 말 142개로 60개 넘게 줄였다. 이 기간 국내 지점도 118개에서 99개로 20개 가까이 감소했다.
동양증권은 국내 지점을 작년 3월 말 165개에서 9월 말 145개로 20개 줄인 데 이어 올해 3월에는 133개로 12개 더 없앴다.
점포 직원을 줄여 인건비를 최대한 절감하려는 의도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최근 스마트폰 주식거래가 늘어나고 있어 점포의 역할이 줄어들고 있다"며 "경기 상황까지 악화하면서 점포 통ㆍ폐합을 추진하는 증권사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산 운용사들도 주식형 펀드 거래가 위축되자 구조조정을 서두르고 있다.
일부 중소규모 자산 운용사는 사정이 나빠지자 매물로 곧 나올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 정도다.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어떤 자산 운용사가 매각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면서 "현재 증권업의 경기상태로 봐서는 이런 소문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고 전했다.
수수료 인하로 타격을 받는 카드업계도 회원 모집비용 등 마케팅 비용을 줄이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하나SK카드 관계자는 "일반경비를 작년 수준으로 동결하거나 작년 이하로 내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소모성 경비 절감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카드 관계자도 "마케팅 비용을 줄이고 신사업을 발굴하는 것이 하반기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카드는 조직(실)을 절반으로 줄이는 구조조정을 단행 중이다. 이번 조직 개편으로 일부 임원, 팀장 보직자리가 없어지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운용 효율을 증대하기 위해 조직 통ㆍ폐합 작업을 진행 중"이라며 "최근 2년간 수익성 악화로 고전 중인 점 등이 고려됐다"고 설명했다.
현대카드 수익은 2010년 3천500억원에서 작년 2천400억원으로 줄었고 올해 2천억원 이하로 예상되고 있다.
비씨카드는 이미 지난해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이사직급을 없애는 등의 조직개편을 시행했다.
비씨카드 관계자는 "수수료 체계 개편으로 카드사들의 수익이 1조원 가까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며 "하반기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한 구조조정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저축은행도 사정이 좋지 않다.
HK저축은행 관계자는 "인위적 감원은 없지만, 공채는 안 하고 결원에 대해서만 충원하는 수준"이라며 "올해 대규모 채용하는 저축은행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업황이 좋은 보험업계는 아직 구조조정 분위기는 감지되지 않고 있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성낙조 대변인은 "아직 산하 지부에서 구조조정이 보고된 곳은 없다"며 "금융회사는 대부분 상시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증권사와 저축은행 중에는 부동산 매각에 나선 곳도 있다.
신한금융투자는 고객지원센터와 여의도지점이 입점해 있는 지상 14층, 지하 4층의 별관사옥을 매각했다.
대우증권은 마산 사옥과 울산남 사옥 매각을 진행 중이고, 대신증권은 올해 초 강남 뱅뱅사거리의 강남지점 빌딩을 매각했다.
또 W저축은행은 올해 초 강남에 있는 건물을 200억~300억원 수준에서 매각한 것으로 전해졌다.
◇ 삼성·한화 등 M&A 적극적
불황으로 인해 파산 위기에 처한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삼성과 SK, 한화 등 대기업들은 M&A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최근 M&A시장의 큰 손으로 떠오른 삼성전자의 공격적인 행보가 눈에 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영국의 반도체 설계회사인 CSR의 모바일 부문을 인수했다. 인수금액은 3억1000만 달러(약 3600억원)로 이번 M&A는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삼성전자가 해외에서 인수한 기업 중 가장 큰 규모다.
CSR이 와이파이(무선랜)·블루투스·GPS 같은 기능을 쓰는 데 필요한 연결 칩의 핵심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스마트폰 경쟁에서 유리한 고점을 차지하기 위한 인수라는 평가다.
SK그룹도 지난 2월 주력계열사인 SK텔레콤을 통해 SK하이닉스를 약 3조원에 인수했다. 이를 통해 SK는 미래 먹거리를 창출하면서 명실상부한 수출지향형 그룹으로 확실한 체질 개선을 이루게 됐다.
한화그룹은 독일의 태양광 셀 제조업체 큐셀(Q-Cells) 인수를 조만간 확정할 전망이다.
큐셀은 셀과 모듈 생산에서 2008년 세계 1위에 오른 글로벌 태양광 업체로 이번 인수가 성사되면 한화 측은 세계 1,2위 수준의 태양광 셀 생산라인을 보유하게 된다.
GS그룹의 계열사 GS에너지는 미국 대형 윤활유업체인 하우톤인터내셔널의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
GS에너지에 따르면 하우톤 측에서 매각을 추진하면서 GS에너지를 비롯해 전세계 관련 업체 및 투자자들에게 인수제안 요청서(RFP)를 발송했다. GS에너지는 현재 인수전 참여 여부를 고민하고 있는 상태다.
대한항공도 한국항공우주(KAI) 인수에 나선다. 한국정책금융공사는 KAI에 대한 매각공고를 내고 오는 16일까지 인수의향서(LOI)를 접수할 예정이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만약 KAI 인수가 성사되면 최근 10년 사이 한진그룹 차원에서 진행되는 가장 큰 M&A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그룹도 전자제품 유통시장 1위 업체인 하이마트를 인수하면서 국내 가전업계 경쟁 구도에도 큰 변화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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