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션

<국민銀 사외이사-경영진 갈등 확산…파국 우려>(종합)


(서울=연합뉴스) 이지헌 기자 = 국민은행 사외이사들이 경영진의 반대에도 23일 한국IBM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하기로 의결하고 경영진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혀 파국이 우려된다.

 

금융가에서는 이사회 내부의 갈등이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며 이건호 행장이 경영책임자로서의 위상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오는 26일 금융감독원의 제재심의위원회에서 이 행장에 대한 징계가 경징계로 낮춰져 이 행장 체제가 유지된다하더라도 어느 한쪽, 혹은 양쪽 모두 물러나지 않는 한 국민은행의 경영은 파행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사외이사 "경영진에 갈등 책임 묻겠다"
이날 이사회 직후 김중웅 이사회 의장 등 사외이사 6명은 별도의 입장문을 내고 전산교체 갈등의 원인이 이 행장과 정 감사 측에 있다고 비판했다.

사외이사진이 공식 입장을 낸 것은 지난달 19일 전산 교체를 둘러싼 갈등 사태가 표면화된 이후 처음이다.

사외이사진은 입장문에서 "주 전산기 선정은 충분한 검토와 검증을 거쳤다"며 "이번 사태의 발단은 IBM 한국대표가 은행장에게 보낸 이메일이었다"고 말했다. 이 행장과 정 감사의 잘못된 판단이 갈등을 키웠다는 주장이다.
 
주목할 부분은 이날 낸 입장문의 마지막 부분이다.

사외이사들은 "흐트러진 은행의 경영의사 결정체제를 하루빨리 잡겠다. 그간의 위법 부당한 행위로 초래된 혼선에 대해 엄정하게 책임을 묻고 사외이사들도 잘못이 있다면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흐트러진 경영의사 결정체제'란 정 감사의 권한 남용과 관련된 것이며 '위법 부당한 행위로 초래된 혼선'은 이사회 결정사항을 뒤집으려한 이 행장과 정 감사를 겨냥한 것이다.

주전산시스템 기종선정 계획에 대해선 "내부의 실무전문가들과 외부의 IT전문가 조력을 받아 조속히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경영진을 의사결정과정에서 배제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사외이사들이 사실상 경영진 퇴임요구를 우회적으로 공식화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날 이사회 의결도 이 행장과 정 감사는 배제한 채 사외이사들이 독자적으로 안건 상정을 주도했다.

은행 관계자는 "이사회 제목만 알려졌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사외이사들이 직접 준비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현행법 체계에서 사외이사들이 주도적으로 경영 안건을 발의하는 것이 금지된 것은 아니다"라며 "다만 통상적으로 발생하는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외이사 "IBM이 시장 교란"…법무실은 '위법성 없어' 결론
사외이사들은 IBM이 국내 금융권에서 독점적인 지위로 시장폐해를 가져왔다며 공정위의 제재를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사외이사인 강희복 시장경제연구원 상임이사는 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2010년 유럽연합(EU)에서도 IBM을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행위로 시정한 사례가 있다"며 "IBM은 시장을 혼란시킨 점에 대해 공정위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국민은행 법무실에서는 사외이사들의 한국IBM 공정위 신고 안건에 대해 '공정위 신고 대상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법무실은 또 은행이 공정위 신고를 강행할 경우 한국IBM 측으로부터 명예훼손과 같은 민형사상 책임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은행 법무담당 관계자는 "은행 내부적으로는 공정위 신고 대상이 안 된다는 결론을 냈다"고 전했다.

사외이사들은 별도로 법률자문을 구해 위법 사유에 해당한다는 답변을 얻고 신고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IBM이 시장지배적 사업자로 인정받으려면 해당 회사의 시장 점유율이 50%를 넘거나 매출액 상위 3개사의 점유율이 75% 이상이어야 한다. 다만. 시장 범위를 어떻게 나누는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

현재 주요 시중은행 가운데 IBM 메인프레임 시스템을 사용 중인 곳은 우리은행과 기업은행[024110](유닉스 전환 예정), 외국계인 한국씨티은행과, 한국SC은행 등으로 많지 않다.

시장 범위를 유닉스까지 포함한 은행 전산시스템 전반으로 본다면 IBM의 시장점유율은 오히려 유닉스보다도 떨어진다.

하지만 메인프레임 시스템만을 별개 시장으로 할 경우 IBM의 점유율은 독점에 가깝다.

글로벌 은행이 대부분 IBM 메인프레임을 고수하고 있어 세계시장에서는 IBM의 점유율이 높은 편이다.

막상 시장지배적 사업자로 인정된다 하더라도 남용행위를 입증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공정위가 포스코[005490]를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으로 제재한 사건이 2007년 대법원에서 패소한 이후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행위의 적용 요건도 매우 엄격해졌기 때문이다.

공정위 신고는 유닉스 시스템으로 전환하기로 한 기존 이사회 의결에 쐐기를 박는 포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국민은행이 한국IBM을 공정위에 신고한 사실만으로 IBM은 향후 국민은행이 발주하는 전산 관련 입찰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 법무실의 반대 의견에도 공정위 신고를 강행한 것은 실제 한국IBM 행위의 위법성 판단과 그에 따른 손실 보상보다도 다른 의도가 개입됐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국민은행 경영진 리더십 손상…파행 예상
신고 배경을 떠나 사외이사들의 이번 결정 강행으로 이건호 행장을 포함한 경영진 측은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게 됐다.

리더십의 손상은 앞으로 국민은행의 경영활동이 파행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예고한다.

다음번에도 사외이사들이 경영진을 배제한 채 경영 안건 추진을 강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민은행 이사회 갈등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자체 진화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건호 행장이 지난 27일 사외이사들과 함께 간담회를 열어 접점을 좁히려는 노력을 했지만 갈등은 악화 일로에 접어들게 된 셈이다.

국민은행 노조의 압박도 거세질 전망이다.

국민은행 노조는 이건호 행장과 정병기 감사를 제외한 나머지 이사진 8명을 업무상 배임과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고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로 했다.

또 해당 이사진 8명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과 4월 24일 유닉스 전환을 승인한 이사회 의결에 대해서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낼 예정이다.

국민은행 이사회 내분 사태는 금융당국의 제재가 확정되고 최고 경영진의 거취가 결정된 후에야 해결의 가닥을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당국은 전산시스템 갈등 등과 관련해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과 이건호 행장 양측에 중징계를 사전 통보한 상태다.

징계 결과에 따라 임 회장과 이 행장이 동시에 물러나거나 적어도 어느 한 쪽은 물러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은행 관계자는 "26일 이후 제재 결과가 확정된 이후에야 어떻게든 사태가 매듭지어질 것"이라며 "그 이전까지는 경영 파행이 일정 부문 불가피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