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청약이라는 말이 옛말이 됐다. 로또 청약의 경우 가점 등 신청 자격을 갖춰야 하지만 현금 동원력도 필요하다. 그런데 중도금 대출이 막히면서 금수저가 아닌 무주택 서민이 서울이나 수도권 아파트 분양을 받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분양 시장이 현금 부자들만의 잔치판이 되면서 주거의 K자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부동산 대출 억제 총력전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지난 13일 기자간담회에서 "올해 상반기에 지나치게 대출이 많이 진행돼 하반기에 연간 대출 총량 목표를 어느 정도 관리해 나가려면 상반기보다 현저하게 축소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대출 규제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지난 10일 금융지주 회장단과의 간담회에서 "가계부채 관리 강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자 최우선 과제"라면서 가계부채 억제에 전력을 다해줄 것을 주문했고, 금융지주 회장단은 '책임을 다해 가계부채 증가율 목표 안에서 관리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위는 애초 가계대출 억제 목표를 '작년 대비 5∼6% 증가' 범위내에서 관리하겠다고 했다가 이미 지난달 5%가 뚫리자 '가능한 6% 선'을 마지노선으로 잡았다.
한국은행의 금융시장동향에 따르면 올해 들어 8월까지 은행 가계대출은 57조5000억원이 늘었는데 이 가운데 주택담보대출(전세자금대출, 이주비·중도금대출 등 포함)이 73.5%(42조3000억원)를 차지했고 나머지 26.5%(15조2000억원)가 신용대출과 마이너스통장 대출 등을 포함한 기타대출이었다.
8월 한 달만 놓고 보면 가계대출 증가액 6조2000억원 중 주택담보대출이 5조9000억원, 기타대출이 3천억원이었다.
올해 들어 지난 7월까지 월평균 2조1000여억원씩 증가하던 기타대출은 금융당국의 창구지도로 눈에 띄게 줄었으나 이 기간 월평균 5조2000억원씩 증가한 주택담보대출 증가세는 여전하다.
따라서 당국의 대출 관리는 주택담보대출에 집중될 수밖에 없지만 올해 급격히 불어난 전세자금대출이나 이주비대출은 실수요자 대출이어서 손을 대기 쉽지 않다. 결국 중도금대출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다.
▲중도금대출 중단에 '로또 청약 옛말'
최근 진행된 '힐스테이트 광교중앙역 퍼스트(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광교택지개발지구 C6 블록)' 1순위 청약에서는 일반 분양분 151가구에 3만4537명이 신청해 228.7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특별공급 청약도 50가구 모집에 8894명이 몰려 148.2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광교택지개발지구 내에서 마지막 분양하는 이 아파트의 공급가격은 84㎡(104가구)는 9억2630만원∼9억8540만원, 60∼69㎡(107가구)는 6억890만원∼8억2380만원으로 책정됐다. 주변 아파트 시세의 거의 절반 가격이다.
문제는 이 아파트 모든 평형에 중도금대출이 안 된다는 점이다. 분양가 9억원이 넘지 않을 경우 시행사의 대출 알선으로 시중은행에서 중도금대출을 받을 수 있는데 이 아파트 시행사는 "중도금대출 알선은 사업주체 및 시공사의 의무사항이 아니다"며 수분양자 자력으로 직접 납부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현금 조달 능력이 있는 사람만 청약에 참여하라는 의미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공급하는 공공분양에서도 중도금대출이 막히고 있다. 최근 LH가 분양한 경기 시흥 장현 A-3블록 아파트(451가구) 청약은 평균 19대 1의 경쟁률을 보였는데, LH는 분양 공고에서 "금융권의 집단대출 규제로 인하여 중도금 대출이 현재 불투명한 상황이며, 중도금 집단대출이 불가할 경우 수분양자 자력으로 중도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알렸다.
통상 분양가 9억원을 넘지 않는 경우 중도금의 60%까지는 대출을 알선해주는 게 관례였는데 이를 40%까지 줄여 알선한 사례도 있었다.
최근 평촌 재개발 정비 사업지에 들어서는 평촌 엘프라우드 아파트(2739가구)는 분양가의 40% 범위 내에서만 중도금대출이 가능하다. 도시형생활주택으로 이달 29일 당첨자를 발표하는 힐스테이트 남산(서울 중구 소재, 302가구)도 분양가의 40%만 중도금대출이 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청년·중저소득 무주택 실수요자에 중도금대출 열어줘야"
건설사들이 이처럼 표변한 것은 금융당국의 주택담보대출 틀어막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출 한도 관리에 비상이 걸린 은행들이 당국의 눈치를 보느라 부동산 대출을 억제하는데다 건설사들로서도 서울과 수도권의 경우 아파트를 짓기만 하면 흥행 대박이어서 굳이 중도금대출을 알선해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중도금대출 규제의 피해는 현금 동원력이 없는 젊은층이나 저소득 무주택자 등 내 집 마련이 간절한 실수요자들에게 집중돼 결국 주거 양극화를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 원장은 "가계대출이 안고 있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볼 수 있지만 모아둔 목돈이 없는 젊은층이나 중·저소득 무주택자들의 내 집 마련 기회를 차단하는 것은 문제가 심각하다"면서 "이는 젊은층이나 저소득층의 주거 안정에 각별히 노력하고 있는 정부의 정책 방향과도 배치된다"고 했다.
고 원장은 "투기적 주택 거래는 규제의 타깃이 돼야 하지만 평생 처음으로 집을 분양받으려는 무주택자나 젊은층은 원리금 상환 능력이 검증된다면 대출에서 충분히 배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대한부동산학회 회장인 서진형 경인여대 교수도 "가계대출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 총량 규제를 해야 한다는 방향은 맞지만, 일률적인 규제보다는 핀셋 규제가 필요한 시점"이라면서 "일부 예외 조치를 통해 무주택 실수요자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 현금 부자만 자산을 불리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고 했다.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은 금융권의 주택 중도금 대출 중단을 '비 오는데 우산 뺏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안 소장은 "금융권이 얼마 전까지도 방만 대출을 남발하다가 당국이 총량 억제를 한다 하니까 대출을 마구 줄이고 있다"면서 "세심하게 접근해 실수요자의 전·월세 대출이나 생애 첫 내 집 마련에 나선 무주택자의 중도금 대출 등을 막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