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이 미국과의 대치 국면에서 호르무즈 해협 통제를 핵심 전략으로 내세우며 초강수를 두고 있다. 세계 원유 수송의 요충지를 장악해 미국 경제에 압박을 가함으로써 추가 군사행동을 억제하겠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미국의 대응 강도와 국제 에너지 시장의 변화를 오판할 경우 이란 경제에도 치명적인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 호르무즈 해협 통제, 협상 카드 아닌 '레드라인'
4일(현지 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란 지도부는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양보할 수 없는 '레드라인'으로 규정했다.
세계 원유 수송의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장악함으로써 미국 경제에 직접적인 부담을 줄 수 있는 협상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란은 미국의 휘발유 가격과 인플레이션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중간선거를 앞두고 결국 협상에 나설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전략이 미국이 전면전보다 장기 교착 상태를 선택할 것이라는 전제에 기반한 고위험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 혁명수비대와 온건파 엇갈린 시각
이란 내부에서도 호르무즈 해협 전략을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경파인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는 핵 프로그램과 중동 내 대리세력이 약화된 이후 호르무즈 해협 통제가 서방을 압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온건파는 미국의 해상 봉쇄와 추가 제재로 이란 경제가 붕괴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 경제 압박 심화…성장률·물가 모두 악화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란의 2026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6%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연간 물가상승률은 약 69%에 이를 것으로 예상됐으며, 이란 국민들은 연료 부족과 전시 상황에 따른 각종 생활필수품 부족까지 겪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긴장이 장기화될수록 이란 역시 원유 수출이 제한돼 국가 재정의 핵심 수입원을 잃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 원유 공급 감소에도 국제유가는 제한적 상승
이란의 해협 통제로 페르시아만 원유 수송량은 전쟁 이전의 약 36% 수준까지 감소했다.
그러나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는 급등세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후티 반군이 홍해 항로를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국제유가는 80달러 아래에서 움직이며 시장 충격은 예상보다 제한적인 모습을 보였다.
일부 원유는 우회 수송이 이뤄졌고, 일부 선박은 이란과 개별 협의를 거치거나 위치정보를 끈 채 해협을 통과하면서 공급 차질을 일정 부분 완화했다.
전문가들은 전쟁 초기 원유 공급이 충분했던 데다 중국의 비축 확대 이후 수요가 둔화된 점도 국제유가 급등을 막은 배경으로 분석했다.

호르무즈해협(Photo : [AFP/연합뉴스 제공])
▲ 미국 제재 지속…중국도 적극 지원 안 해
미국은 대규모 군사공격 위협 수위를 일부 낮췄지만 해상 봉쇄와 대이란 제재는 유지하고 있다.
이란 원유 수출 역시 호르무즈 해협 통과에 의존하는 만큼 장기적인 봉쇄는 이란 경제에도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중국 역시 이란을 적극 지원하지 않고 있다. 중국은 이란산 원유 구매를 줄이며 국제유가 상승을 억제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 구매 확대 움직임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 호르무즈 개방 놓고 물밑 협상 진행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개방과 미국 해상 봉쇄 해제, 핵 프로그램 협상을 포함한 새로운 합의를 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반면 이란은 미국과 직접 협상은 진행하지 않고 있다고 반박했다.
대신 호르무즈 해협 남쪽에 위치한 오만과 선박의 안전한 통항을 위한 임시 항로 개설 방안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은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들로부터 통행료를 징수하는 방안도 요구하고 있다.
이집트와 파키스탄, 카타르 등 중재국들은 임시 항로가 마련되면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도 재개될 가능성이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 미국도 '해협 정상화 후 핵 협상' 구상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우선 호르무즈 해협 문제를 해결한 뒤 핵 프로그램 협상으로 이어지는 '2단계 접근법'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해협을 정상화한 이후 핵 문제를 협상하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구상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평가됐다.
미국 정부는 지난 6월에도 휴전 이후 협상을 추진하는 방식을 시도했지만 외교적 진전이 지연되면서 대이란 군사행동을 재개한 바 있다.
▲ 중동 산유국, '탈 호르무즈' 속도 낸다
장기적으로는 이란의 협상력이 약화될 가능성도 제기됐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주요 산유국들이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는 원유 수송망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공급망이 다변화되면 이란이 해협을 통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도 점차 축소될 것으로 전망됐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들 우회 수송망 역시 이란의 미사일과 드론 사정권 안에 있어 군사적 긴장이 지속될 경우 완전한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고 분석했다.
▲ 중동 국가들 "통행료보다 정치적 지렛대가 더 큰 문제"
최근 호르무즈 해협에서는 여러 척의 선박이 공격을 받았으며 홍해와 지중해에서도 선박 피격이 이어지는 등 분쟁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걸프 지역 국가들은 통행료 자체보다 이란이 해협 통제권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을 더욱 우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