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일보 김영은 기자] 박근혜 대통령은 15일 국회 정무위의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논의와 관련, "상임위 차원이기는 하겠지만 (대선) 공약이 아닌 것도 포함돼 있는데 무리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이같이 밝히면서 "여야 간에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 같기는 하다"며 국회의 경제민주화 논의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박 대통령은 또 "중소기업이나 대기업들이 미래성장동력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서 "이같은 투자에 대한 규제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푸는 것이 좋다고 보는데 이것이 경제민주화와 상충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성실한 투자자에 대해서는 적극 밀어주고 뒷받침하고 격려하는 것이지, 자꾸 누르는 것이 경제민주화나 정부가 할 일은 아니다"라며 "특히 국내 기업이 역차별을 받는 것은 아닌지, 과감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국회에서 논의 중인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것은 지나친 규제가 국내 기업들의 투자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경제민주화 후퇴 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정무위에서 논의 중인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따르면, 재벌 계열사 간 거래는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일감 몰아주기로 간주해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한 입증 책임도 공정거래위원회가 아닌 기업 쪽에 지우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일감을 몰아준 기업뿐 아니라 일감을 받은 기업에도 관련 매출의 최대 5%의 과징금을 물리는 방안이 추진되는 내용이어서 재계가 반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박 대통령은 이같은 강력한 대기업 규제와 압박이 자칫 대기업의 건전한 투자 활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4ㆍ1 부동산 정상화대책 발표에 이어 조만간 국회에 추가경정예산안 제출을 앞둔 시점에서 대기업의 투자가 위축되면 정부의 경제활성화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는 것이다.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은 이와 관련, "애초 대통령이 생각한 것보다 더 나아간 방향으로 우리 기업들이 움츠러들 수 있는 규제가 거론되니 이에 대해 정부가 중심을 잡고 대처하라는 의미로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조 수석은 "사익 편취를 막을 제도적 장치를 만들라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라며 "정당한 투자활동까지 위축시키는 것이 새 정부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얘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정당한 경제활동이 정당한 보상을 받는 시장질서를 세우겠다고 수차례 강조해왔고 지배주주의 사익 편취 행위에 대해 철저히 과징금을 물리겠다는 의지에는 변함이 없지만 정무위에서 논의 중인 공정거래 관련 법안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고 인식했다는 설명이다.
박 대통령은 대선 당시 '대기업집단 총수일가의 불법 및 사익편취행위 근절'을 공약으로 제시하면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에 대해 집행유예가 불가능하도록 형량 강화 ▲대기업 지배주주ㆍ경영자 중대범죄에 사면권 행사 제한 ▲일감 몰아주기 등 총수일가 부당내부거래 금지규정 강화 및 부당 내부거래로 인한 부당이익 환수 등을 약속한 바 있다.
박 대통령은 이와 함께 국내 기업들이 외국 기업과 비교해 규제에서 더 많은 차별을 받는 현실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박 대통령은 "외국 기업 유치를 위해 많이 노력을 하는데 국내 기업이 역차별을 받는 것은 아닌지 과감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11일 청와대에서 외국인투자기업 및 주요국 주한상공회의소 관계자들과 오찬 간담회를 갖고 다양한 지원과 규제 완화를 약속한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에도 이에 상응한 규제 완화 등 지원을 베풀어 투자 활성화를 끌어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다만 박 대통령이 이날 우려를 표명한 것을 놓고 새 정부가 출범한 지 50일 밖에 되지 않아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가 후퇴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민주통합당은 당장 이날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 논의에 우려를 표한 것과 관련, 국회 정론관에서 브리핑을 갖고 "부당한 부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규제하는 것이 정부와 국회가 할 일"이라면서 "경제민주화의 필요성과 절실함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이 부족한 게 아닌가 우려된다"고 비판했다.
그는 "공정거래법 등 경제민주화 법안들은 18대 국회 때부터 필요성이 제기됐으며 `여야 6인 협의체'에서 합의한 83개 법안에 포함된 내용"이라며 "17일부터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에서 논의될 예정"이라고 상기시켰다.
이 원내대변인은 특히 박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 논의에) 대선공약이 아닌 것도 포함돼 있는데 무리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고 말한 것을 언급, "대통령의 공약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국회에서 논의하면 안된다는 뜻인지 묻고 싶다"고 비판했다.
이어 "대통령의 3권분립 인식에 큰 문제가 있는 듯 하다. 입법권은 국회에 있다"며 "입법권에 관련된 사안을 미리 언급해 여당에 압력을 가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민주화가 무리한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된다"고 밝힌 이날 학계에서도 경제민주화가 "너무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여당·정부 고위 인사는 여전히 경제민주화가 현 정부의 국정철학이라는 입장을 나타냈다..
조동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15일 서울 은행회관에서 열린 한국경제학회의 '새 정부의 경제정책방향' 세미나에서 "경제민주화는 허구"라고 주장했다.
조 교수는 "대기업이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중소협력업체를 쥐어짠다"는 경제민주화의 전형적인 예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가 2005~2011년간 한 전자기업의 협력업체 100여 개와, 이들 협력업체와 자산·매출·업력이 비슷한 같은 수의 일반업체를 분석한 결과 협력업체의 자산대비 순이익(ROA)·고용 여력이 훨씬 좋게 나왔다.
조 교수는 "일각의 '재벌, 그들만의 잔치'라는 질타는 심정적 예단에 불과하다"며 "현 상황은 C 학점을 받은 학생이 '교수가 자신의 학점을 후려쳤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가가 '경제민주화' 이름으로 특정 계층의 편의를 도모하면 이는 오히려 기득권을 보호하는 것"이라며 "소비자 후생과 기업활동 자유를 제약하는 것을 '민주화'로 포장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토론자로 나선 김종석 홍익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도 이에 동의했다. 김 교수는 "'착한 경제민주화'와 '나쁜 경제민주화'를 구분해야 한다"며 나쁜 경제민주화는 경쟁과 개방을 제한하고 조직화한 이익집단에 포획돼 조직 이익을 보호하는 형태라고 정의했다.
김 교수는 "이런 경제민주화는 결국 이익집단의 떼쓰기가 득세하는 관치경제를 초래한다"며 "경기침체를 가속화하고 생산성·일자리·세수를 감소시켜 복지 재정을 확충을 어렵게 하는 악순환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기업이 시장지위를 남용하는 것은 현행법으로도 처벌할 수 있다"며 "그럼에도 납품단가 협의제를 도입하는 등 사업자간의 시장을 나눠주는 일이 거침없이 벌어지고 있어 우려된다"고 말했다.
조성봉 숭실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역시 "산업구조조정·경쟁프로세스를 역행하거나 늦추는 것은 우리 경제의 경쟁력을 훼손하는 일"이라며 현재의 경제민주화가 과도한 규제를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박 대통령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통신비, 유통구조 감독도 필요하지만 선의의 경쟁구도를 만드는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고 저절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감독도 해야 하지만 외국 사례도 보면서 노력을 해 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온실가스 배출량 규제에 대해 기업들에게 계속 부담이 되면 지키기도 어렵고 기업도 힘들어지게 된다"면서 "과학기술과 외국 성공사례를 활용해서 배출가스를 줄이는 데 하나의 시장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은 추가경정예산 편성과 관련, "추경을 마중물로 해 민간투자와 소비가 활성화되려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2017년까지 균형 재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추경과 주택시장정상화 대책이 성공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고용사정에 대해서는 "지난주 발표된 3월 고용동향을 보면 새 정부 고용목표 48만개의 절반에 불과하고 특히 청년 고용률은 38.7%로 1984년 이후 최저 "라며 "청년층과 여성을 위한 새로운 일자리 창출계획, 노사정 일자리 대타협 등에 대해 신속히 논의가 진행되도록 '노사정위원회' 가동을 적극 검토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창조경제와 관련, 박 대통령은 "인수ㆍ합병(M&A) 활성화 등 정부가 해야 할 노력을 미래창조과학부에서 리스트를 만들어서 빨리 뜨도록 해야 한다"면서 "창조경제에 관련해서는 국민께 좀 더 친근하게 알리기 위해서 많은 사례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박 대통령은 이어 "코레일, 과학비즈니스 벨트 등에 대해 갈등 확대를 막아야 하는데 정부가 너무 나서지 않고 조정이 되도록 지켜볼 필요도 있다"면서 "너무 처음부터 나서기보다는 상황을 잘 판단하셔서 조정을 통해 갈등이 수습되도록 해 주시기 바란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사회적 갈등이 예상되는 잠재적 정책현안에 대해 조기경보체제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국정기획수석실과 해당 수석실 간 자료와 정보 공유가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칸막이 없는 협업체계 구축이 중요하다"면서 "칸막이 제거와 부처 간 협업에 대해 가장 솔선수범해야 할 곳이 청와대"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