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정부가 보조금과 지분 참여를 통해 전략 산업에 직접 개입하며 시장의 자율적 기능을 넘어선 새로운 경제 질서가 부상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보호주의를 넘어선 신경제 민족주의의 발현이며, 그간 시장의 심판자 역할에 머물렀던 정부의 스탠스 변화를 의미한다. '정책이 가격보다 우선'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한 각국의 치열한 각축전이 펼쳐지고 있다.
▲ 신경제 민족주의의 부상과 정책 우선주의
최근 국제 경제 환경은 과거의 자유무역주의 원칙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기술 패권 경쟁 심화, 지정학적 리스크 증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각국 정부는 자국의 핵심 산업 보호 및 육성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는 '신경제 민족주의'가 자리한다. 신경제 민족주의는 단순히 자국 기업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반도체, 인공지능, 배터리, 바이오 등 첨단 산업 분야에서 정부가 직접적인 주체로 나서 시장의 작동 원리보다 정책적 목표를 우선시하는 경향을 말한다.
실제로 주요국 정부는 막대한 규모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전략 기업에 대한 지분 참여를 통해 산업 생태계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는 시장의 효율성 논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으로, 국가적 차원의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안목이 투영된 결과이다. 일례로, 미국은 자국 내 첨단 제조업 유치를 위해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투입하는 법안을 시행하며 글로벌 기업들의 생산 기지 이전을 유도하고 있다. 유럽연합 역시 핵심 기술 및 산업 보호를 위한 강력한 정책 프레임워크를 구축하며 역내 경쟁력 강화에 집중한다. 이러한 정책적 개입은 기업의 투자 결정뿐만 아니라 생산과 고용, 기술 개발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글로벌 산업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정책이 가격보다 우위에 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더 이상 예외적인 현상이 아닌, 전 세계적인 표준으로 자리매김하는 양상이다.
▲ 시장 심판자 탈피: 정부 역할의 재정의
전통적인 시장 경제 체제에서 정부는 주로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고 시장 실패를 보정하는 '심판자' 역할에 머물렀다. 시장의 자율적인 가격 결정 기능과 효율성을 존중하며, 최소한의 개입으로 시장의 작동을 보장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신경제 민족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정부의 역할론은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이제 정부는 단순한 심판자를 넘어, 특정 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적극적인 '선수'이자 '전략가'로 변모하는 중이다.
이러한 변화는 정부가 단순히 규제를 만들거나 보조금을 지급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적으로 기업의 지분을 확보하거나 국부펀드 등을 통해 전략 산업에 투자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시장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목표 달성을 위해 시장을 주도적으로 형성하고 재편하려는 의지를 반영한다. 예를 들어, 특정 첨단 기술 개발을 위해 민간 기업과 공동 투자 법인을 설립하거나, 국가 주도로 핵심 원자재 공급망을 구축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러한 직접적인 개입은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저해하고 공정한 경쟁 환경을 왜곡할 수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각국 정부는 국가 안보와 경제 주권 확보라는 더 큰 명분 아래 이러한 정책을 강행하는 추세이다. 정부의 역할 재정의는 기업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이자 동시에 예측 불가능한 위험 요소로 작용하며, 기업들은 정부 정책과의 조화를 통해 생존과 성장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 한국 경제의 대응 전략과 향후 과제
전 세계적인 신경제 민족주의와 정부의 시장 개입 심화는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중대한 도전이자 기회를 동시에 제공한다. 그간 한국은 자유무역과 시장 효율성을 기반으로 성장해왔으나, '정책 우선주의'가 지배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는 과거의 성공 방정식만으로는 한계에 봉착할 수 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적인 접근이 시급하다.
우선, 한국은 자국의 핵심 전략 산업을 명확히 정의하고, 이들 산업에 대한 선별적이고 집중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반도체, 배터리, 미래 모빌리티 등 초격차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분야에는 과감한 연구개발(R&D) 투자와 세제 혜택,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동시에, 핵심 원자재 및 부품의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는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유사시에도 산업 생산을 유지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다.
나아가, 정부는 시장 심판자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전략적 '조력자'이자 '파트너'로서 민간 기업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민간의 혁신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국가 안보 및 경제 주권과 직결되는 분야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리스크를 분담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이 중요하다. 다만,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이 자칫 민간의 자율성과 혁신을 저해하거나,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 논란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투명하고 공정한 원칙 아래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이달부터 시행될 예정인 관련 법규 정비와 제도 개선은 이러한 균형점 모색에 중요한 초석이 될 것이다. 한국 경제는 신경제 민족주의의 파고 속에서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해야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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