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의 통화완화 정책과 미국 고용지표 호조로 위험자산 투자심리가 살아나면서 9일 원·달러 환율은 5년 10개월 만에 최저치인 1,016원대로 저점을 낮췄다.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원화 강세 기조는 여전하겠지만 환율이 쉽사리 세자릿수까지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외환당국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 열흘 만에 다시 무너진 1,020원선
원·달러 환율은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전 거래일 종가보다 4.3원 내린 1,016.2원으로 장을 마쳤다. 장중 환율은 1,016.0원까지 떨어졌다.
달러당 원화 환율은 2008년 8월 7일(종가 1,016.5원) 이후 처음으로 1,010원대에서 종가를 형성했다.
지난 3월 초 달러당 1,070원대에서 급격히 하락하던 환율은 외환당국의 개입에 대한 경계감에 한 달간 1,020원대의 종가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ECB가 시장 예상치를 뛰어넘는 통화완화 정책을 내놓은 가운데 미국 고용지표까지 개선된 것으로 나타나자 열흘 만에 장중 1,020원 선을 내줬다.
100엔당 1,000원 선을 깨고 내려온 엔·원 재정환율도 이날 오전 3시 10분 현재 오전 6시 종가보다 4.15원 내린 991.67원에 거래되고 있다.
우선, 지난 5일(현지시간) ECB가 내놓은 기준금리 인하, 마이너스 예금금리 등의 적극적 통화완화 조치가 국제 시장에서 위험자산인 신흥국 통화의 강세 요인으로 작용하며 원·달러 환율 하락을 이끌었다.
ECB는 앞으로 직접 돈을 푸는 양적완화 조치를 추가 도입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언급해 신흥국 통화 전반의 강세 압력이 높아졌다.
신흥국 국채금리가 미국·유럽보다 높은 수준인데다, 한국은 신흥국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경제의 기초여건(펀더멘털)이 양호한 것으로 평가받아, ECB의 통화완화 정책으로 풀린 자금이 국내로 들어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날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는 주식 213억원 어치를 순매수했다. 19거래일 연속 순매수다.
미국에서 14년 만에 처음으로 신규 일자리가 4개월 연속 20만개 이상 늘고 실업률도 6.3%로 낮은 수준을 보였다는 5월 고용지표가 발표된 것도 원화 강세 요소가 됐다.
임노중 아이엠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고용지표 호조는 달러화 강세 요인이지만, 그렇다고 원화 약세가 동반되는 것은 아니다"며 "미국 경기가 좋으면 한국 수출이 증가, 달러가 국내로 들어오기 때문에 원화가 더 강세를 띨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이번달 원·달러 1,000원 선은 유지될 것"
앞으로도 원화 강세 기조가 지속될 것이라는 데에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견이 없다.
그러나 당분간 원·달러 환율이 세자릿수까지 떨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글로벌 통화정책의 '엇박자'와 외환당국이 개입할 것이란 경계감 때문이다.
달러당 900원대의 세자릿수 환율은 2008년 7월 11일 이후 단 한 번도 도달하지 않은 영역이다.
전문가들은 통화완화정책을 거둬들이려는 미국과 새로 완화책을 펴려는 유로존이 맞선 가운데 달러·유로화 움직임이 둔화했기에 원•달러도 가파르게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정경팔 외환선물 외환시장분석팀장은 "ECB의 적극적 통화완화 조치로 촉발된 원화 강세 압력이 이어지겠지만, 미국의 경제지표 호조로 달러화 약세가 동반되지 않기에 원화 강세 정도는 제한될 것"이라고 말했다.
손은정 삼성선물 연구원도 "지금은 원화 강세 요인이 우위에 있지만, 하반기로 갈수록 미국 경기가 좋아지며 달러화가 강세를 띨 것"이라며 "원·달러 환율이 연중 세자릿수로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외환당국의 미세조정(스무딩 오퍼레이션)도 원·달러 환율이 1,000원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는 요소다.
전승지 삼성선물 연구원은 이번 주 원·달러 환율이 1,010∼1,025원에서 움직일 것으로 예상하면서 당국의 개입 강도를 주목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선성인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수출업체의 달러화 매도 물량이 꾸준히 나와 환율 하락 요인이 되겠지만, 외환당국의 개입에 대한 경계감에 원·달러 환율의 하단이 지지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