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경술국치' 113주년을 맞은 29일, '독립운동 영웅'으로 알려져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이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경술국치란 경술년인 1910년 8월29일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한 '국가적 치욕'을 의미합니다. 이 날은 일제가 대한제국에게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을 규정한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날입니다.
국방부는 지난해 11월부터 육군사관학교(육사) 생도 교육시설 앞에 설치된 독립운동 영웅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철거하는 방안을 검토해왔습니다.
그러다 논란이 커지자 홍범도 장군 흉상만 철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는데요.
이는 홍범도 장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 이범석 장군 등과 같이 싸우기는 했지만, 소련 측의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만주로 돌아갔던 이들과는 달리 다른 길을 갔고 공산주의 이력이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이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에 설치해 기념하는 것이 육사의 정체성을 고려했을 때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 홍범도 장군은 독립운동 영웅인가 공산주의자인가
홍범도 장군은 1868년 8월27일 평안북도 자성에서 태어났습니다.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았고, 그해 11월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해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여 격파하며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제 점령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국내에 잠입해 곳곳에서 일본군을 급습했습니다.
1920년 6월 일본군은 반격에 나서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해왔는데, 700여명의 독립군을 이끌고 3일간 일본군 157명을 사살했습니다. 이를 봉오동 전투라고 하며, 2019년에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같은해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제1연대장으로 참가해 큰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은 5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토벌작전에 나섰습니다.
이에 독립운동단체들이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했고, 홍범도 장군은 이들의 통합을 주선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부총재가 됐습니다.
1921년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령 자유시(알렉세예브스크)로 이동해 주둔했습니다.
하지만 한국독립군의 해체를 요구하는 일본군과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당 간의 협상 및 독립군 내부에서의 정치적 대립이 맞물리면서 '자유시 사변'이 발생했습니다.
자유시 사변은 1921년 6월 소련이 독립군에 무장해제령을 내리고, 이에 불응한 독립군을 포위하고 집중공격했던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독립군 상당수가 참변을 당했고, 한국 무장독립전 사상 최대의 비극으로 남게 됐습니다.
이후 홍범도는 남은 독립군 부대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했고,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설립된 고려혁명군관학교에서 혁명군 양성에 참여했습니다.
이 때문에 홍범도 장군이 독립운동 과정에서 소련 공산주의 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홍범도는 1923년 이후 연해주 이만으로 돌아와 집단농장인 '콜호스'를 차려 농사를 지었습니다.
집단농장은 공산주의 국가의 당책으로, 농지의 소유권 및 경영을 공동으로 하는 농장의 형태입니다. 1920년대 말 스탈린주의적 산업화가 시작되고 국가정책에 의해 사유재산 몰수가 실시되면서 지배적인 농업경영 형태가 됐습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홍범도는 러시아 정부에 참전을 요청했었고,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인 '레닌기치'에 젊은이들의 참전을 촉구하는 기고문을 싣기도 했습니다.
홍범도는 조국 해방을 불과 2년 앞둔 1943년 10월25일 타국 땅에서 끝내 숨을 거뒀습니다.
◆ 홍범도 장군 흉상이 만들어지기까지
1962년 박정희 정부에서는 홍범도 장군이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2016년 박근혜 정부는 1800톤급 해군 잠수함을 '홍범도'함으로 명명했습니다.
이후 2017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이 국방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광복군과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의 전통도 우리 육군사관학교 교과과정에 포함하고 광복군을 우리 군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밝힌 것이 홍범도 장군 흉상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입니다.
2018년 3월 독립전쟁에 나섰던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선생의 흉상이 육사 교내 충무관에 설치됐습니다. 이 흉상들은 우리 군 장병이 훈련으로 사용한 실탄의 탄피 300kg을 녹여 제작한 것입니다.
이후 2019년 4월에는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토카예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장군의 유해 봉환을 요청했고, 2021년 8월15일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유해가 봉환됐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중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고, 유해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찬성 입장들
육사 출신인 이종섭 국방부 장관 휘하 군 당국자들과 장성 출신인 국민의힘 신원식 의원, 육사 총동창회 등은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 가입 이력이 있어 육사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회 국방위원회 여당 간사인 3성 장군 출신 신원식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6·25 전쟁이 소련의 지원으로 북한이 일으켰다는 점을 감안하면 문재인 정부 때 홍범도 장군 흉상을 설치한 것은 사실상 소련 공산당에 면죄부를 준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육사 총동창회는 입장문을 통해, 역사적 평가가 상반되는 인물에 대한 조형물 배치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6·25전쟁을 일으키고 사주한 북한군, 중공군, 소련군 등에 종사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한 사실이 분명히 확인된 인물이 포함되어서는 안 되며, 이러한 인물의 흉상에 육사 생도들이 거수경례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국방부는 육사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와는 별개로 용산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흉상 이전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의 함명도 필요하면 변경하겠다는 방침입니다.
대통령실과 여당은 국방부와 육사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라는 입장입니다.
◆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반대 입장들
독립운동 단체들은 군이 국가 수호라는 본연의 임무를 등한시하고 때아닌 이념논쟁에 뛰어들어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고 규탄하고 있습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보낸 공개서한을 통해 "북한은 김일성을 무장독립투쟁의 최고 수반으로 선전해온 터여서 그보다 위대한 홍범도 장군 유해를 모셔가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의 봉환 사업을 방해했다"며 "홍범도 장군을 새삼스럽게 공산주의자로 몰아 흉상을 철거한다면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동"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선양 단체로 구성된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항단연)은 기자회견을 통해 "어떤 이유로도 부정할 수 없는 고귀한 역사와 전통을 무시하고 말살하려는 의도는 반국가적, 반역사적, 반민족적 범죄행위라는 것을 국방부와 관계자들은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광복회 대전지부 등 보훈단체 관계자 40여명은 "독립운동 영웅들의 흉상을 육사에서 철거하려는 것은 국군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고 헌법정신을 훼손하는 반민족 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국민의힘 소속 김태흠 충남지사는 언론을 통해,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가입 전력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 건국과 6.25 전쟁을 맞물려서 판단해야 한다며 흉상 철거 반대 입장을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