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보기술(IT) 기업 킨드릴(Kyndryl)의 네덜란드 기술기업 솔비니티(Solvinity) 인수 계획이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전격 차단됐다.
단순한 기업 인수합병(M&A)로 보였던 이번 거래는 미국과 유럽 간 신뢰 균열, 디지털 주권 논쟁,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를 둘러싼 지정학적 갈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번 결정은 네덜란드가 미국 기술기업의 인수를 국가안보 문제를 이유로 공식 저지한 첫 사례로 기록됐다.
▲ 네덜란드 정부, 미국 기업 인수 첫 공식 차단
지난해 11월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IT 서비스 기업 킨드릴은 네덜란드 기술기업 솔비니티를 1억1,500만 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중소 규모 기술기업 간 거래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하지만 이번 사례는 달랐다.
미국과 유럽이 관세, 안보, 그린란드 문제 등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는 가운데 인수 추진 소식이 알려지자 네덜란드 정치권과 정부는 즉각 조사에 착수했다.
결국 네덜란드 정부는 지난 5월 26일 인수 금지를 결정했다.
▲ “미국 정부가 데이터 접근 강요할 수 있다”
9일(현지 시각) 뉴욕타임스(NYT)가 입수한 비공개 판결문에 따르면 네덜란드 당국은 미국 정부가 킨드릴에 민감한 정부 데이터를 제공하도록 강제할 가능성을 핵심 우려로 지목했다.
규제 당국은 판결문에서 “공공의 이익에 대한 위협은 인수를 금지하는 것 외에는 막을 방법이 없다”며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디지털 의존성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단순한 기업 경쟁 문제가 아니라 국가 데이터 주권과 안보 문제로 인식됐음을 보여준다.
▲ 기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 불신’
이번 거래의 당사자인 킨드릴과 솔비니티 자체보다 더 주목받은 것은 유럽 내에서 확대되고 있는 미국에 대한 불신이다.
솔비니티는 네덜란드 국민 디지털 신원인증 시스템인 ‘디지D(DigiD)’의 핵심 기술을 제공하는 기업이다. 디지D는 세금 신고, 의료 기록 조회, 복지 서비스, 연금, 교육 정보 등 대부분의 정부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필수적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해당 시스템이 미국 기업 통제 아래 들어갈 경우 국가 핵심 인프라가 외국 정부의 영향권에 놓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 과거 중국 견제 논리, 이제 미국에 적용
그동안 미국 정부는 국가안보와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중국 기술기업들을 제재하고 투자 제한 조치를 취해왔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는 동일한 논리가 미국 기업에 적용됐다.
미국 상무부 출신 에밀리 벤슨은 “민감한 정보를 미국 기술기업에 무조건 맡기는 것에 대한 광범위한 반발이 시작되고 있다”며 “유럽연합(EU)이 훨씬 엄격한 투자안보 체계를 구축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 유럽 전역으로 번지는 ‘디지털 주권’ 움직임
이번 사건은 유럽 각국이 추진 중인 디지털 주권 강화 정책과도 맞닿아 있다.
현재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는 유럽 클라우드 시장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 정보기술 시스템의 약 3분의 2 역시 미국 기술기업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연합은 최근 발표한 ‘기술 주권(Tech Sovereignty)’ 전략에서 특정 클라우드 계약에서 미국 기업 참여를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영국 의회도 이달 미국 데이터 분석 기업 팔란티어(Palantir)와 체결한 3억3,000만 파운드 규모의 의료 데이터 계약 해지를 요구하며 국가안보 우려를 제기했다.
▲ 유럽 ‘트럼프 리스크’ 우려
전문가들은 유럽 내 미국 기술기업 경계심이 단순한 경제 문제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불신과 깊게 연결돼 있다고 분석한다.
유럽 관계자들은 국제형사재판소(ICC) 관계자들이 미국 제재를 받은 이후 미국 디지털 서비스 이용이 제한된 사례를 언급하며 미국 정부가 민간 기술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인공지능(AI) 기업에 대한 정부 지분 참여 가능성을 언급한 점도 유럽의 경계심을 키우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 자문 경험이 있는 기술 전문가 베르트 후버트는 “이번 거래는 마치 디지털 통제권을 도널드 트럼프에게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평가했다.
▲ 네덜란드 의회와 시민사회 강력 반발
초기에는 네덜란드 내무부도 인수를 막을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반대 여론은 빠르게 확산됐다.
올해 1월 네덜란드 의회는 공개 청문회를 열고 거래를 집중 검증하겠다고 밝혔다.
디지털 정책위원회 소속 바르바라 카트만 의원은 “네덜란드 시민과 정부를 연결하는 핵심 시스템이 미국 기업 통제 아래 들어간다면 필수 공공서비스가 외국의 권력 투쟁 속 희생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유럽연합(Photo : [로이터/연합뉴스 제공])
▲ 미국 정부까지 나섰지만 설득 실패
거래 무산을 막기 위해 미국 정부도 직접 개입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임명된 조 포폴로 주니어 주네덜란드 미국대사와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네덜란드 정부 관계자들에게 인수 승인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킨드릴은 “정치적 논란이 거래가 가져올 분명한 이점을 가렸다”고 반발했지만 인수는 결국 무산됐다.
▲ 핵심 쟁점은 미국 ‘클라우드법’
네덜란드 당국이 가장 우려한 법적 근거는 미국의 클라우드법(CLOUD Act)이었다.
이 법은 미국 정부가 해외에 저장된 데이터라도 미국 기업이 보유하고 있다면 제출을 요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러한 법률이 자국의 국가 신원인증 시스템을 사실상 미국 정부 영향권 아래 두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판결문 역시 미국 정부가 디지D 시스템에 접근할 가능성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며 이를 국가안보 위험 요소로 규정했다.
▲ ‘디지털 독립’ 향한 유럽의 새로운 전환점
이번 사건은 단순한 기업 인수 무산이 아니라 유럽이 미국 중심 디지털 생태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네덜란드 정부는 최근 디지D 운영권을 앞으로 유럽연합(EU) 기반 기업에만 맡기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미국 빅테크 기업 의존도를 줄이고 국가 핵심 데이터와 디지털 인프라를 유럽 내부에서 통제하겠다는 전략적 판단으로 해석된다.